손시내 한국독립영화협회 비평분과
콜센터로 현장실습을 나갔던 특성화 고등학교 학생이 저수지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다음 소희>의 전반부 줄거리를 요약하는 이 문장은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말이기도 하다. 영화는 2017년 1월에 전주에서 발생한 실제 사건을 모티프로 만들어졌다. 이는 탐사보도 프로그램인 SBS <그것이 알고 싶다>의 2017년 3월 18일 자 방송분 ‘죽음을 부른 실습 - 열아홉 연쇄 사망 미스터리’가 자세히 다루기도 했던 사건이다. 심층 취재를 통해 작성된 기획 기사나 르포 등을 통해 고등학생 현장실습의 실태, 일터에서 죽거나 다치는 청년들의 이야기는 계속해서 수면 위로 떠오르며 사회적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더는 안타까운 죽음이 되풀이되지 않아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 이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슬프게도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될 기미는 보이지 않고 비슷한 사건, 사고 역시 끊이지 않고 있다. 이러한 현실을 다루는 영화는 자연히 현실 속 영화의 자리와 역할을 질문하게 한다. 이토록 아픈 현실에서 영화는 무엇을 할 수 있으며, 영화를 통해 우리는 어떤 것을 하게 되는가? 분명한 건, 반성과 분노만이 다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출처=다음영화)
실화를 배경으로 한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영화가 크게 2부 구조로 이뤄져 있다는 점이 <다음 소희>의 눈에 띄는 특징이다. 1부는 콜센터에서 일하게 된 소희(김시은)가 어떤 시간을 통과하는지 지근거리에서 보여준다. 2부는 형사 유진(배두나)이 소희의 사망사건을 수사하면서 벌어지는 일을 담는다. 누군가의 죽음과 그것의 진실을 파헤치는 형사. 언뜻 생각하기에 흔한 설정인 것 같지만, 사망사건이 극의 동력이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다음 소희>는 사망사건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사실들로 사망사건 이전의 시간을 재구성하는 일반적인 수사물의 방식을 취하지 않는다.
그저 시간의 흐름을 따라가며 지금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들여다볼 뿐이다. 시간 순서대로 모든 것을 보여준다는, 그다지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이 영화의 전략은 실은 그 자체로 가장 큰 특징이다. 그 덕에 관객은 사건이 아니라 존재에 좀 더 집중하게 된다. 아무리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서 춤추고, 화가 날 땐 주먹을 날릴 만큼 거침없는 소희에게 말이다. 러닝타임이 절반 정도 지나고 나면 그 존재는 사라진다. 그 아이는 이제 여기에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이 기묘한 부재의 감각과 함께 영화의 나머지 절반을 견뎌야 한다. 어쩌면 현실의 문제를 다루고자 하는 영화가 통렬한 반성과 분노에 앞서 집중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감각의 회복인지도 모른다. <다음 소희>는 스스로 다짐하는 것 같다. 이 세상에서 누군가 사라져버린 그 느낌을 반드시 기억하자고 말이다.
한편 <다음 소희>에는 콜센터 노동의 현실이 세밀히 그려져 있다. 담임선생님이 ‘대기업’이라며 소개한 그곳은 실제로는 ‘하청의 하청의 하청’인 통신회사의 콜센터. 게다가 소희가 근무하게 된 곳은 인터넷 상품을 해지하려는 고객을 상대하는 ‘해지 방어팀’이다. 이미 해지하려는 의도로 전화를 건 고객을 상대하며 상담원은 온갖 고초를 겪는다. 일이 고된 만큼 퇴사율이 엄청나지만 빈자리는 실습생들로 끊임없이 채워진다. 팀장은 그들의 일이 “처음부터 끝까지 마인드 컨트롤”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피로와 짜증이 누적될 수밖에 없는 해지 방어팀의 시스템은 애초에 마인드 컨트롤과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영화는 콜센터 노동자가 마주하는 어려움이 막연히 폭언 정도일 것이라고 짐작하는 일반적인 선입견을 넘어, 그들이 맞닥뜨리는 시스템의 문제를 보여준다. 방어율이 곧 실적이라는 모토에 걸맞게 모든 업무는 고객의 서비스 해지를 방어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가장 간편한 방식은 한 상담원이 해지 업무 전반을 처리할 수 없게 만들어놓는 것이다. 다음 절차는 다음 상담원이 담당한다. 그렇게 해지를 최대한 지연시킨다. 심하게는 28번까지 콜을 돌리면서 말이다. 이는 물론 시스템이 강제한 것이지만, 누적되는 고객의 피로와 짜증을 받아내는 건 고스란히 상담원의 몫이 된다.
(출처=다음영화)
이 이상한 절차는 언뜻 책임을 분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책임의 분산이 아니라 책임의 사슬이라 불러 마땅한 풍경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체계 안에서 누군가는 해지 방어에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은 곧 팀 전체의 실적을 끌어내리며, 이는 곧 센터의 실적 하락으로 이어진다(고 회사는 말한다). 콜은 항상 밀려있고 누군가는 응대를 해야만 한다. 내부 고발장을 쓰고 팀장이 자살한 다음에도 팀원들은 다른 팀에게 더 큰 피해가 가지 않도록 빨리 업무를 재개할 것을 강요받는다. 게다가 이 체계에선 너무 잘하는 것도 문제가 된다. 목표치가 올라가고 다른 팀원들이 실적의 압박을 받기 때문이다. 그렇게 일해도 실습생은 계약서에 명시된 임금을 다 받지 못한다.
계약 자체가 모호하게 체결된 탓이다. 약속된 인센티브도 실습생들의 잦은 퇴사를 근거로 당월에 지급되지 않는다. 불합리한 노동 환경에 대한 불만과 저항은 자율성이라는 허울 좋은 명목에 부딪힌다. “하기 싫으면 하지 마. 누가 떠다밀었어?” 영화는 사슬처럼 얽힌 책임의 광경을 들여다보며, 그만두고 싶으면 그만두면 된다는 말이 얼마나 비현실적인지 보여준다. 소희의 담임선생님마저 “너 때문에” 후배들 앞길이 막히고, 우리 반이 망신당한다고 이야기한다. 현장실습생 한 명에게 이 고리를 끊을 힘은 없다. 괴로운 시간의 지속 끝에 소희는 결국 자기 존재를 지운다.
유진이 수사를 진행하면서 수없이 듣게 되는 “어쩔 수 없다”는 말은 소희가 마주했던 벽이 한 학교, 한 회사를 넘어 사회 전반에 걸쳐 세워져 있다는 걸 실감케 한다. 콜수, 판매량, 취업률과 같이 수치로 평가받고, 모든 것이 인센티브로 연결되는 체계 속에서 안전한 노동 환경처럼 실적 이외의 것을 고민하는 건 그야말로 리스크를 떠안는 일이나 다름없다. 여기서 책임은 조각난 채 흩뿌려져 있다. “학생이 일하다 죽었는데 누구 하나 내 탓이라는 사람이 없어.” 분노와 안타까움이 뒤섞인 유진의 말은 이러한 현실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물론 소희에게는 어쩔 수 없다는 말로 책임을 회피할 선택지조차 주어지지 않았다는 게 가장 크게 다른 점이긴 하지만 말이다. 비슷하게도, 유진의 행보를 통해 우리는 한 명의 형사에게 이러한 현실을 바꿀 힘이 없다는 사실을 보게 된다. 얼핏 <다음 소희>는 이게 현실이라는 장학사의 말을 반복하는 것처럼 보인다. 왜 이렇게 안타까운 죽음이 발생했는지 하나하나 살피는 것이 영화의 일차적 목표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음 소희>는 “왜 그렇게 됐는지” 보여주는 것이 곧장 체념으로 연결되지 않을 경로를 고민한다.
(출처=다음영화)
여기엔 두 번의 죽음과 세 번의 대면이 있다. 소희가 일하던 팀의 팀장이 내부 고발장을 남기고 자살한 사건이 먼저 일어나고, 뒤이어 소희가 저수지에 스스로 몸을 던지는 일이 발생한다. 그처럼 두 번의 죽음이 발생하기 전, 영화는 항상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 보는 장면을 보여준다. 카메라를 바라보는 인물의 정면 숏으로 이뤄져 있다는 점에서 이 대면은 다른 대화 장면들과 형식적으로 다르다.
소희가 성희롱하는 고객에게 참지 못하고 화를 낸 다음, 소희와 팀장이 대면할 때 영화는 두 인물의 얼굴을 각각 정면에서 담는다. 팀장의 죽음 이후 소희가 징계의 의미로 무급휴직을 받았을 때, 학교에 찾아간 소희와 담임선생님의 대면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찍혔다. 이 반복은 결국 타인의 죽음 앞에 속수무책이 되고 마는 우리의 무기력함을 무기력하게 가리키기 위한 장치일까? 그런데 우리는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또 다른 대면의 순간을 마주하게 된다.
소희와 함께 춤을 췄고, 지금은 공장 노동과 택배 노동 사이를 떠돌며 고단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태준(강현오)과 유진의 대면이다. 현장실습의 현실을 마주하고 난 유진은 태준에게 참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도 된다고 이야기해준다. 이 장면의 감정적 온도는 앞선 두 대면의 장면과 다르다. 이해와 위로를 마주한 태준에게는 어쩌면 조금은 다른 미래가 열릴지도 모른다. <다음 소희>는 죽음의 인과성은 보여주되, 어떤 죽음도 필연적이지 않다고, 그 고리는 우리가 끊을 수 있다고 그렇게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