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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민중에서 보편적 ‘시민’으로서의 노동자로

정혜윤 한국노총 중앙연구원 연구위원

등록일 2021년08월17일 08시46분 트위터로 보내기 네이버 밴드 공유

노동자·민중이란 권력에 의해 억압받고 사회경제적 배분으로부터 소외된 사회적 약자를 의미했다. 민주화를 선도한 학생운동 세력이 연대의 주체로서 호명한 용어이기도 했다. 과거 ‘민중 프로젝트’는 민주화과정에 기여한 측면도 있으나, 이후 ‘노동자’가 ‘노동하는 보편적 시민’이란 의미로 자리 잡지 못한 원인으로 이어지게도 했다. 노동자·민중론에서 노동자란 노동하는 보통의 시민보다는 ‘탄압받는 소외된 약자’이자 ‘제조업 블루칼라’, 혹은 ‘계급투쟁을 완수해야 하는 주체’라는 좁은 의미만 가지기 때문이다.

 


▲ 출처 = 이미지투데이

 

그 결과 여전히 ‘노동 문제’는 노동하는 대다수 보통의 시민의 삶 문제가 아닌 일부 노동운동이나 진보진영의 특수한 문제로 여겨진다. 노동문제를 논하는 방식도 민주주의에서 노동권과 시민권을 가진 평범한 시민의 문제로서 다뤄지기보다 ‘불쌍한 약자’와 ‘기득권’ 같은 양극단을 오간다.

비정규직이나 취약한 노동자들의 문제를 이슈화할 때 해당 노동자의 열악함이나 ‘억울한 피해 사실’에 초점을 맞추며 한편으로 분노를 다른 한편으로 ‘온정주의’를 자극하곤 한다. 노동하는 보통의 시민이 아니라, 사측이나 관리자에게 착취받고 탄압받는 ‘피해자성’만 강조된다. 그러다 피해자의 도덕적 흠결이나 생각만큼 ‘약자’가 아니었다 밝혀지면 여론은 돌아서고, 문제해결은 어려워진다.

 

그런데 노동자의 사회적 시민권의 확대란 그가 빈자이고 착취 받는 피해자라 구제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사회적 성장에서 배분받을 권리가 넓어진다는 뜻이다. 자애로운 엘리트가 물질적 혜택을 시혜하는 것이 아니라, 가치를 향유할 노동자 스스로 분배에 관한 정치 과정에 참여하게 된다는 관점이기도 하다.

언젠가 생산성에 따른 합리적 처우를 중시하는 일견 보수파에 가까워 보이는 젊은 학자에게 진보적 지식인들의 시혜적 관점이 때로 노골적으로 느껴져 불편하단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양극화를 비판하고 약자에 대한 보호를 말하는 이들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스스로를 온정을 베푸는 자혜로운 엘리트로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온정주의가 오히려 노동자를 권리의 주체가 아니라 가여운 피해자로 박제화하지 않는지 되돌아볼 일이다.

역으로 상대적으로 임금이 높거나 노조로 조직화된 집단에 대해서는 취약한 빈자가 아닐 뿐 아니라, 역사적·계급적 연대의식이 희박하다는 점에서 ‘기득권’ ‘이기주의’ 같은 비난에 노출된다. 외환위기 이후 대대적 신자유주의 공세 속에 노동조합은 노동시장의 전면적 자유화를 막아내려 했지만, 기업 단위와 일부 정규직에 머무른 것은 노조의 역량 부족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 노조가 지켜낸 상대적으로 나은 일자리 때문에 비정규직이 차별을 받는다 전후관계를 뒤집는다.

 

공정한 임금체계로 변화하지 못한 모든 책임을 노동조합에 전가하는 언사도 종종 들린다. 구성원 간 합의 가능한 표준화된 직무·성과 체계를 만들지 못하는 사회적 한계를 모르지 않을 텐데 말이다. 노동운동에 대한 애정 어린 비판인 경우도 있겠으나, 상대가 거부감이 들 만한 배제의 언어까지 사용할 때는 민주주의 역사에서 노동자 역할에 대한 객관적 인식보다 ‘노동자·민중론’에서 강조했던 ‘계급적 주체’에 가까운 규범적 신념이 앞서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민주주의 사회는 약자도, 강자도 그가 선하든, 악하든 모두 평등한 시민이고 주체다. 오히려 민주주의 통치체제를 설명하는 다양한 학자들에 의하면 인간은 이기적이고 욕망에 휘둘리는 존재지만, 자기 이해관계에 따라 무리를 만들어 다양한 결사체 사이에서 조정을 거치면 훨씬 나은 공동체를 만들 수 있다고 본다. 인간사에서 차이와 갈등은 불가피하고 모두를 동일한 의견을 갖게 하거나 이타적 존재로 바꿀 수 없다. 물론 약자라고 선량하지 않으며 처음부터 연대의 가치를 잘 이해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약자도 잘 연대하고 결사해 수적으로 강자가 되면 비교적 공정한 타협이 가능하고, 그 경험이 쌓이다 보면 조금 나은 가능성을 찾으려 할 뿐이다.

 

노동자 개인은 약자이지만 노동조합이란 결사체를 만들어 사측과 국가 관료제에 맞서 싸움과 타협을 해냈기에, 지난 200년간 불평등이 불가피한 자본주의 내에서도 상당한 수준의 노동권 보호와 복지 확대를 꾀할 수 있었다. 물론 노동운동 내부든, 사측과 관계에서든 이견과 갈등은 불가피하고 끝나지 않는다. 무수한 싸움과 타협 속에 조정을 거치는 과정만 반복될 뿐이다. 즉 이기적 개인들이 다양한 집단을 이뤄 차이나 갈등을 없앨 수는 없어도 조정과 타협을 통해 ‘공익’에 가깝게 만들어갈 뿐이다. 애초부터 ‘옮음’을 추구하는 이타적·역사적 주체란 없다.

노동운동하는 이들의 날 것의 이야기를 접할 때가 있는데 학생 시절 막연한 생각과 달리, 조합원의 이기적 행태나 자기네 이익만 고집하며 감정싸움만 일삼는 일부 활동가를 보며 실망스럽다는 한탄을 듣는다. 사람이 모이면 온갖 이들의 정념과 이해관계가 부딪히기 마련이며, 노동운동을 한다고 정의롭거나 인격이 조화로운 구성원만 있을 리 없다. 그럼에도 괴로움을 견디며 이기적 개인과 집단 간 이해관계를 조정하며 조금씩 넓게 대표하려 할수록 노동운동은 진전할 것이다. 노력의 작은 한걸음들이 역사를 만드는 것이지, 처음부터 훌륭한 역사적 주체는 없다는 위로를 감히 드리고 싶다.

※ 이 글은 매일노동뉴스(http://www.labortoday.co.kr) '윤·희의 넌 어때?' 코너에 공동 연재되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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