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슨하고 열린 대화체제
사회적 대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하자. 일반적으로 사회적 대화는 노사정 주체가 모여 노동 관련 갈등을 해결하려는 장(場)으로 이해된다. 꼭 노사정이 모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노사나 노정 등 2자가 모여도 된다.
사회적 대화의 형식도 다양하다. 제도적인 틀로서는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와 지역노사민정협의회가 있지만 제도의 바깥에도 다양한 대화의 틀이 제각각의 모습으로 존재한다. 따라서 ‘사회적 대화 = 경사노위’라고 좁게 이해할 필요는 없다.
사회적 대화가 반드시 합의를 추구하는 것도 아니다. 사회적 대화는 협의의 과정이고 그 우연한(!) 결과가 합의일 뿐이다. 합의문에 사인하지 못하면 말짱 도루묵이라는 성과주의는 이참에 떨쳐내야 한다. 셔틀외교 하듯 가볍게 만나 서로 소통하고 이해하면서 ‘합리적인 불일치’에 도달하는 것도 대화의 중요한 역할이다(이런 자세가 합의의 가능성을 높인다는 건 역설이다). 사회적 대화를 협의 과정으로 규정한 것은 2018년 경사노위를 띄울 때 양대 노총을 포함해 노사정이 합의한 사항이다.
마지막으로 사회적 대화는 정치적 교환을 핵심으로 삼는 노동정치의 장이다. 어느 일방의 이해가 일방적으로 관철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교환이고 그것이 단체교섭과 같은 산업 공간이 아니라 정책이나 입법을 다루는 정치 공간에서 이뤄진다는 점에서 정치적이다. 결론적으로 사회적 대화는 경직적이고 닫힌 체제가 아니라 느슨하고 열린 체제에 해당된다.
‘정의로운 전환을 위한 가교’
지금 우리 사회는 패러다임의 전환을 경험하고 있다. 먼저 신자유주의는 뒷걸음질 치며 역사의 뒤안으로 물러가고 있지만, 그것과 바통터치할 새로운 사회경제질서는 여전히 안갯속이다. 또한 우리 사회는 저출산·고령화는 물론 깊어가는 양극화와 불평등의 강을 건너고 있다. 거기에다 코로나 19와 같은 감염병의 세계적 유행(pandemic)과 함께 기후위기와 디지털 전환을 맞고 있기도 하다.
너울성 파도가 쉼 없이 방파제를 때리듯 거대한 전환이 한꺼번에 밀어닥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전환이 사회적 갈등을 피할 수 없게 한다면 갈등을 사회화하고 해결하는 장치로서 사회적 대화가 갖는 의의는 적지 않다. ‘정의로운 전환을 위한 가교’로서 사회적 대화가 다시 평가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질문은 “한국에서 사회적 대화가 가능한가?”로 되돌아간다. 결론부터 말하면 “가능하다. 하지만 조건이 필요하다”라는 것이다. 앞서도 말했지만 사회적 대화가 당사자 사이의 합의를 목표로 삼는다면 한국에서 사회적 대화의 꿈은 드물게 현실이 된다. 노사 어느 쪽도 상대에게 양보할 수 있을 만큼의 리더십을 갖추지 못한 게 사실이라면 정치적 교환은 성립되기 어려운 탓이다. 합의를 회피할 필요도 없지만 협의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도 중요하다.
두 번째로 한국에서 사회적 대화를 위한 제도적인 조건은 취약하다. 중앙집중적인 노사단체도, 노동자 친화적인 사민주의 정당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사회적 대화는 대화 주체들의 의지에 의존한다. 사회적 대화의 불쏘시개는 정부의 정치적 진정성이겠지만 거기에 화력을 더해 불땀을 높이는 건 노동조합이 할 일이다.
노동탄압의 시대가 낳은 노동조합의 투쟁우선주의는 노조가 아직도 과거의 강물에 발을 담그고 있다는 신호에 지나지 않는다. 노동조합이 전환의 주체가 되기를 원한다면 민주사회에 걸맞는 저항문화를 형성할 필요가 있다. 투쟁과 대화는 동전의 양면이지만 투쟁은 대화를 위한 수단으로서 대화에 종속된다.
중층적이고 다면적인 대화체제
앞서 말한 두 가지 전제, 사회적 대화는 협의를 주종으로 삼는다는 사실을 수용하고 주체들의 대화하려는 의지가 확인된다면 나머지는 기술적인 문제들이다. 몇 가지만 적으면 이렇다. 먼저 중층적이고 다면적인 사회적 대화체제를 구축하는 일이다. 중층적이란 것은 전국차원뿐 아니라 산업·업종별이나 지역별로도 사회적 대화가 성립한다는 사실을 말한다(기업차원도 가능하다). 또한 다면적이라는 것은 제도의 안에서 뿐 아니라 제도의 바깥에서도 사회적 대화의 판이 벌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산업·업종이나 지역에서 이뤄지는 사회적 대화는 해당차원의 특수한 의제를 다룬다. 당사자들의 직접적인 이해관계를 다루는 만큼 당사자들이 사회적 대화의 성과를 피부로 느끼는 장이 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중간수준의 사회적 대화는 사회적 대화의 출발점이 되고, 전국수준의 사회적 대화를 안정시키는 토대가 된다.
사회적 대화는 제도적인 틀거리에서 벌어지기도 하지만 제도의 바깥에서, 때로는 정부가 빠진 상태에서 이뤄지기도 한다. ‘플랫폼 노동대안 마련을 위한 사회적 대화 포럼’이나 ‘택배노동자 과로방지 사회적 합의기구’ 등이 대표적이다. 이는 경사노위에 참가하지 않고 있는 민주노총이 참여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지만 더욱 중요하게는 노사중심의 원칙이 관철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노사가 자율적으로 사회적 대화를 꾸린다는 것은 사회적 대화가 그만큼 절실하다는 사실을 말한다. 노사주도에 따른 책임감도, 합의의 가능성도 높아진다.
요컨대 경사노위에 의존하는 사회적 대화체제를 벗어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이 경우 경사노위는 사회적 대화의 장이면서 동시에 사회적 대화의 허브로서 제반 사회적 대화를 지원하고 촉진하는 역할을 담당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경사노위 체제의 개편도 언급할 필요가 있다. 경사노위를 협의기구로 규정한다면 의결제도가 필요한지는 의문이다. 계층위원의 실험은 획기적이었지만 ‘탄력근로제 사태’를 거치면서 계층위원의 대표성과 책임성이란 점에서 한계를 드러낸 것도 사실이다. 노사정이 모여 노사중심의 원칙을 확인했지만 그 원칙의 실현은 아직도 요원하다. 노사중심의 원칙은 한 걸음 나아가 경사노위의 자율성·독립성의 문제에 가닿는다. 경사노위를 대통령 자문기구에서 독립적인 위원회로 바꾸는 걸 논의할 시점이라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현실에서 사회적 대화를 모색하는 노력을
우리사회는 지난 20여년간 사회적 대화를 실험해왔다. 시행착오의 과정도 거쳤고 몇 차례에 걸쳐 대화기구를 수술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회적 대화는 여전히 기대수준에 미치지 못한 채 가능성의 공간으로만 남아있다. 사회적 대화는 전환의 시기를 맞아 우리 사회에서 얽히고설킨 갈등을 풀어내는 구심점이 될 수 있다. 전환의 계곡을 어떻게 건널 것인가, 누가 전환의 비용을 부담할 것인가를 둘러싼 갈등을 풀 수 있는 열쇠이기도 하다. 사회적 대화를 위한 구조적인 조건들이 성숙되기를 기다릴 일이 아니라 주어진 조건 속에서 사회적 대화를 찾아가는 것이 사회적 주체들이 당면한 시대의 요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