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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계급에서도 여성은 더 아래에 있다

박신영 작가 <백마 탄 왕자들은 왜 그렇게 떠돌아 다닐까>, <제가 왜 참아야 하죠?> 저자

등록일 2021년03월04일 09시53분 트위터로 보내기 네이버 밴드 공유

오빠랑 옛날 이야기를 하는 것이 나이들수록 좋아진다. 마음 터놓을 올케언니도 친구도 있지만, 어린 시절 고생한 이야기는 오빠밖에 나눌 사람이 없다. 보통 ‘힘든 시기 잘 넘기고 우리 남매 잘 컸네’라며 서로 위로해 주며 대화를 마친다. 안 그럴 때도 있다. 현실 남매답게 경쟁하던 어릴 적 습관이 살아나서인지, 누가 더 많이 고생했나를 놓고 쓸데없이 말씨름하기도 한다. 전국 고생 자랑 시간이 돌아왔습니다. 딩동댕~

 

주로 고픈 배 움켜쥐고 아르바이트를 하던 20대 전반 시절로 돌아가 고생담 배틀을 하곤 하는데, 오빠와 나의 이야기에는 결정적 차이가 있다. 이런저런 힘든 일과 사람에 시달렸다는 오빠의 체험은 내게도 기본이다. 거기에 나는 성폭력 경험을 더한다. 같은 서빙 알바를 했더라도 오빠는 엉덩이 만지는 남자손님을 만난 적이 없다. 피곤해서 버스에서 잠들더라도 옆 좌석에 앉은 남자가 다리를 붙이고 비벼대던 경험이 없다. 밤길에 뒤따라오던 남자가 가슴 만지고 도망가는 일을 겪지도 않았다.

 


△ 이미지 = 클립아트코리아

 

“뭐야? 그런 일이 있단 말야?” 오빠는 놀란다. “그러니까 내가 얼마나 힘들었겠어. 아버지 돌아가셔서 학비 대 줄 사람은 없어도, 내 힘으로 대학을 마치고 내 꿈을 이루리라고 씩씩하게 살고 있는데 이런 일을 겪으니 말이야. 오빠는 알바 마치면 그냥 편하게 집에 오면 되지? 난 모르는 남자들에게 맞을까봐 긴장하며 집에 돌아 왔다구.” “진짜야? 왜 너를 때려?” 그때는 몰랐다. 밤길 가면 다가와서 이유 없이 때리고 가는 남자들이 있었다. 이제는 안다. 그게 여성 혐오 범죄라는 것을. 세상에는 여성을 때리고 만지면서 스트레스를 푸는 남자들도 일부 있다는 것을.

 

“진짜라니? 술 취한 남자가 주먹을 휘두르며 따라와서 오빠가 알바하던 가게로 들어간 적도 있었는데?” 이제는 고생 자랑에 이기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오빠 교육에 착수한다. “그랬던가? 기억이 안 나는데.” 오빠는 머리를 긁적인다. 나는 설명한다. “오빠는 키 크고 건장한 남성이기에 이런 일을 겪지 않고 살았던 거야. 하지만 오빠가 안 겪었다고 해서 그런 일이 없지는 않지. 단지 현실을 못 보거나, 보고도 지나치고 있을 뿐. 봐, 내게는 목숨이 달린 심각한 일이었는데 오빠는 기억도 못하잖아. 그런데 진짜 그런 일이 있냐고 물으면 여성들은 입을 닫게 되거든. 의도한 바는 아니겠지만 현실을 알고 바꾸려면 증언하는 여성들의 입을 막아서는 안 되지. 동생은 이렇게 살았지만, 오빠의 딸은 다른 세상에 살아야 하잖아? 아, 말을 많이 했더니 목이 마르네.” 오빠는 말없이 일어나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준다.

 

오빠와는 그래도 대화가 되는 편이다. 주위 남성들을 만나 이야기해보거나 그들이 쓴 글을 읽어보면 한숨이 나온다. 페미니즘은 부르주아 여성들만의 주장이라거나 여성 문제보다 계급문제/노동문제가 먼저라거나 어머니 세대/조선 시대/중동 여성들보다 살기 좋은데 왜 저러냐는 말과 글들. 오빠와 내 경우를 보라. 같이 10대에 아버지를 잃고 곰팡이 만발한 반지하에서 고생하며 살았다. 하지만 여성인 나는 남성인 오빠가 겪은 고통은 기본으로 겪고, 성폭력까지 더 겪었다. 이렇듯 같은 계급에서도 여성은 더 아래에 있다. 이게 현실이다. 그리고 비교를 하려면 같은 시대/계급/나이대의 남성과 여성을 비교해야 한다.

 

맥주 한 모금 마셨다. “오빠, 있잖아. 나는 내가 겪은 사실을, 나의 역사를 증언해서 세상을 더 좋게 바꾸고 싶을 뿐인데 86세대 남자 선배들이 자꾸 내가 배부른 ‘여류’ 작가이고 남성을 혐오한다고 하네?” 오빠는 안주로 구워온 노가리를 찢으며 말한다. “내 또래에서도 대학에 간 애들보다 못간 애들이 더 많았어. 학번이 있는 애들보다 없는 애들이 더 많다구. 86세대 남성들이 우리 세대 남성들 전체를 대표하는 것은 아니야. 신경 쓰지 말고 계속 해.” 아, 우리 오빠 잘 컸다. 여동생이 누구니. 누가 오빠를 이렇게 잘 키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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