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4월 29일 13시 32분, 이천시 모가면 소고리 640-1 한익스프레스 남이천물류센터 신축공사 현장에서 갑자기 큰 폭발음과 함께 건물 전체를 뒤덮는 검은 연기와 화염이 뿜어져 나왔다.
노동절을 이틀 앞두고 있던 그 날은 장기간의 연휴가 시작되는 날이어서 대다수의 노동자들이 간만에 가족들과 휴가를 즐길 생각에 들떠 있었다. 하지만 남이천물류센터 현장에서 일하던 38명의 노동자들은 가족들의 곁을 영영 떠나야 했다. 근래에 이렇게 많은 건설노동자가 한꺼번에 사망한 사고는 없었다. 1년 동안 전국에서 산업재해로 사망하는 건설노동자가 대략 500여명 정도 된다는 점을 보면 38명이 한 현장에서 사망한 이 사고가 얼마나 참혹한 지 다시 한 번 알게 해준다.
12년 전 사고에서 한 치도 나아지지 않았다
사고 원인 조사가 진행 중이지만, 당시 현장 지하에서 노동자들이 우레탄 폼 작업과 화물 엘리베이터 설치를 위한 용접작업을 지척에서 동시에 진행했다는 점이 밝혀졌다. 우레탄 폼에 발포제를 첨가할 때는 기름 증기가 다량으로 나와 화기에 조금이라도 노출되면 매우 위험하다. 마치 주유소에서 자동차에 휘발유를 넣으며 가까이서 담배를 피우는 상황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이는 12년 전인 2008년 이천 냉동창고 화재 원인과 매우 유사한데, 40명의 노동자가 화마에 휩쓸려 전국이 떠들썩했던 12년 전의 사고에서 한 치도 나아진 점이 없는 셈이다.
또한 시공사는 산업안전보건공단이 서류심사 2차례, 현장 확인 4차례에 걸쳐 유해위험방지계획서 상 화재 위험성이 있다는 경고를 받았음에도 전혀 개선을 하지 않았음이 드러났다. 게다가 현장에는 안전관리자도 배치되어 있지 않았고 상황전파 등 재해발생 시 비상대응체계도 작동하지 않았다. 안전불감증과 총체적 관리부실이 종합된 명백한 인재였다.
사고 원인이 알려지자 국민들은 분노했다. 정부도 적극 대응에 나섰다. 정세균 국무총리는 긴급하게 사고현장에 방문해서 화재 진압 상황을 점검했다. 그리고 재발방지 대책 마련을 위한 범정부 TF가 구성되었다. 이후 합동분향소가 차려지고 국무총리와 대통령 비서실장, 경기도지사, 이천시장 등 높으신 분들이 유가족을 찾아 위로했다. 여기까지는 우리 모두가 아는 이야기이다. 이제 다른 이야기를 좀 해볼까 한다.
2018년 12월 11일 새벽, 한국발전기술 소속 계약직 노동자 김용균이 11일 오전 태안 발전소 석탄이송 컨베이어 벨트에 끼어 현장에서 사망했다. 대통령의 애도와 전 국민들의 위로와 추모가 있었다. 그리고 사건이 발생하고 나서 한 달 정도가 지난 12월 27일, 오랫동안 계류 중이었던 산업안전보건법의 개정안이 ‘김용균법’이라는 이름으로 통과가 됐다.
2019년 9월 11일 충청남도 아산시의 온양중학교 앞 어린이 보호구역 내 횡단보도를 건너던 9살인 김민식 군이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청와대 청원이 올라갔고 대통령까지 부모를 만나 위로했다. 사건 발생 한 달만인 10월 11일 국회에서 소위 민식이법이라는 ‘도로교통법 일부개정법률안’과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이 발의됐다.
20대 국회는 끝내 외면했다
2020년 4월 29일 한익스프레스 남이천물류센터 신축공사 현장에서 화재사고로 38명의 건설노동자가 사망했다. 부상자도 10명에 달했다. 사망한 노동자 중에는 20대의 앳된 청년도, 처자식이 있는 40대의 가장도, 머나먼 카자흐스탄에서 넘어온 이주노동자도 있었다. 그리고 이천 물류창고 화재사건도 한 달이 지났다. 그러나 노동계가 요구한 중대재해 기업처벌법은 제정되지 못했고 20대 국회에서 그대로 폐기됐다.
2018년 ‘김용균법’이 통과될 때의 사회적 성찰과 반성의 분위기도 없다. 2019년 ‘민식이법’이 법이 통과될 때의 일사천리 같은 정부와 국회의 일처리도 없다. 국민의 분노도 서서히 사그라들고 있다. 결국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은 또 물 건너 가는 것인가? 사고 한 달 만에 통과된 ‘김용균법’, 사고 한 달 만에 발의된 ‘민식이법’에 비해서 너무나 초라하다. 김용균의 목숨, 김민식의 목숨, 그리고 38명 건설노동자의 목숨 사이에도 경중이 다르단 말인가.
문재인 대통령은 중대재해 기업처벌법 제정약속 지켜라!
문재인 대통령은 대선 당시 공약으로 산재 사망사고를 절반으로 줄이고, 중대재해와 산재다발 사업장에 민형사상 책임을 강화하며, 사망사고 등 중대사고 발생 시 기업 및 공공기관의 책임을 과실치사로 묻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제정하겠다고 천명했다. 그러나 문재인 대통령의 임기가 절반이 지난 지금 이 공약은 지켜진 것이 하나도 없다. 산재사망 사고는 줄어들 기미가 없으며, 산재로 인한 사망사고 발생 시 사업주의 형사처벌에 하한형을 도입하는 산안법 개정안은 국회에 가기 전 국무회의에서 미리 빠졌다. 그리고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은 2017년 고 노회찬 의원의 입법발의 외에는 부처에서의 어떠한 입법 추진도 없고, 여당의 입법 발의도 전무하다.
이천 물류창고 화재사건이 있은 지 20일 후인 2020년 5월 19일 충남서산 LG화학 공장에서 또 불길이 올랐다. 이 화재로 1명이 숨지고 2명이 부상을 당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입버릇처럼 말하던 노동존중 사회가 이런 모습이던가. 지금이라도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을 임기 내에 조속히 추진하는 것이 문재인 대통령이 국민과 노동자에게 한 약속을 늦게나마 지키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