有朋이 自遠方來면 不亦樂乎아
벗이 있어 먼 곳에서 온다면 즐겁지 아니한가?
지난 글에서 인용한 구절의 바로 다음에 나오는 이 구문도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하다. 어느 정도 연배가 있는 사람은 오랜만에 찾아온 친구와 술잔을 기울이며 한 번쯤은 읊조려 봤을 것이다. 이 구절을 통해 오늘 우리가 고민할 주제는 ‘낙(樂)’, 곧 ‘즐거움’이다.
공자는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기쁘다고 했는데 벗이 찾아온다면 즐겁다고 한다. 기쁨과 즐거움의 차이는 무엇일까? 배움은 스스로 모방하고 반복하면서 새롭게 변신하는 과정에서 기쁨을 느끼는 것인 반면에 즐거움은 타자와 함께 하는 과정에서 생겨난다. 곧 즐거움은 나 혼자서 느끼는 기쁨이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 공유하는 기쁨이다.
서양사상에서 ‘즐거움’이라는 주제는 고대부터 현대까지 중요한 탐구의 대상이다. 플라톤에게 즐거움은 지혜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나오고 에피쿠로스에게는 무지와 공포에서 벗어난 마음의 평정에서 나온다. 중세 기독교사상에서는 욕망을 추구하는 것 자체를 죄악시하는 금욕주의를 바탕으로 즐거움은 추구하면 안 될 것으로 여겼다. 고대 희랍의 인본주의 정신을 재해석한 르네상스를 거친 근대 서양사상은 인간의 모든 행위를 괴로움을 멀리하고 즐거움을 추구하려는 욕망으로부터 해석한다.
서양 근대의 사상과 제도, 문화를 바탕으로 한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는 주로 근대 서양사상의 즐거움에 대한 해석을 암암리에 받아들이고 있다. 일제 식민지배와 전쟁을 겪은 이후 한동안 생존을 위한 삶을 살아오다, 80~90년대 이후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느 정도의 물질적인 풍요를 누릴 수 있게 되면서 생존이외의 가치를 찾게 된다. 그 과정에서 근대적 문물과 사고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개인의 즐거움의 추구에 높은 가치를 매긴다. 이는 ‘행복’이라는 이름으로 변용되어 우리가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목표가 되어 사회에 퍼져 나간다. 그런데 추구해야 할 목표도 알고 그를 위한 물질적인 조건도 어느 정도 갖추어졌는데 왜 사람들은 즐겁지 않은가? 왜 행복하지 않은가?
즐거움에 대한 서양사상은 다양한 변주에도 불구하고 공자가 이야기하는 누군가와 ‘더불어 함께함’이라는 맥락이 빠져있다. 이런 공자의 즐거움을 더욱 적극적으로 해석한 맹자를 통해 유학의 즐거움을 재해석해보자.
전국시대의 주요 강국 중 하나인 양(梁)나라 혜왕과의 대화에서 맹자의 사상은 잘 드러난다. 양혜왕은 맹자와 왕궁의 정원을 걸으며 대화하다가 옛 현인들도 이런 즐거움을 누리는지 물어본다. 이 물음에는 혹시나 맹자가 왕으로서 홀로 넓고 화려한 정원을 차지하는 사치를 누리는 것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현자라고 한다면 부귀보다는 빈천한 조건에 더 어울리니 이런 즐거움을 누릴 수 없는 것은 아닌지 하는 의문이 깔려있다. 이런 물음을 던지는 양혜왕에게 즐거움의 조건은 외부에 있다. 진수성찬의 음식, 화려한 옷과 궁궐, 강한 권력 등이 그것이다. 수천 년 뒤의 우리네도 대부분 양혜왕과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것 같다. 우리가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외부 조건 때문으로 여긴다. 그런데 외부 조건이 내가 바라는 대로 이루어진다고 해도 그 순간뿐이지 내 즐거움을 채우기에는 항상 부족하다.
여기서 맹자는 ‘능락(能樂)’이라는 표현을 쓴다. 곧 즐거움은 조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능력에 있다는 말이다. 만일 즐거움이 조건에 있다면 나의 즐거움은 나에게 달려있지 않다. 반면에 즐거움이 능력이라면 그것은 나에게 달려있다. 맹자에 의하면 어떤 조건에서라도 타자와 더불어 함께할 수 있다면 그것이 즐거움의 능력이다. 왕에게 즐거움의 능력은 ‘여민락(與民樂)’, 곧 백성과 즐거움을 함께 함에 있다. 이를 우리 시대의 언어로 바꾼다면 ‘연대(連帶)’라고 할 수 있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연대’는 해야만 할 도덕적인 어떤 가치이고 즐거움은 그와 다른 개인적인 활동에서 얻으려 한다. 하지만 맹자에 의하면 즐거움은 어딘가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함께하는 ‘연대’에 있다.
배움을 통해 기쁨을 얻은 그대, 즐거움의 길로 들어서지 않겠는가!
<필자의 저서인 ‘민주주의자, 맹자와 플라톤’에 이에 대한 더욱 자세한 내용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