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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준연동형비례대표제는 한국정치를 구원할 수 있을까

정혜윤(한국노총 중앙연구원 연구위원)

등록일 2020년03월10일 15시56분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① 과도한 제도주의를 경계한다 
② 제도보다 중요한 것은 조직이다

 

  만약 노동조합 임원선출에 조직 혁신을 이유로 외부에서 유명 인사를 영입하면 어떨까. 투표 방식도 대의원이나 조합원투표가 아니라 대국민개방형선거를 실시한다면? 그렇게 선출된 임원이 조합원들의 다양한 요구나 산별·연맹 및 단위노조 간 엇갈리는 이해관계나 갈등을 조정하고 통합하는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을까. 정치도 마찬가지다. 정치는 정당 조직이 하는 활동이고 이는 노동조합과 다르지 않다. 

 

  국회에서 매해 통과되는 법안은 수백 건에 달한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개인과 집단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법제도를 만들고 국가예산을 심의한다. 그 과정에서 쟁점을 이해하고, 이해관계자 간 첨예한 갈등을 조정하는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한국의  정당들은 선거를 앞두고 새롭게 창당하거나 이합집산을 거듭해왔다. 정치인들은 <쇄신>을 이유로 당 밖에서 영입되고 교체율은 세계 최고수준이다. 과연 이런 불안정한 조직에서 해당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는 전문적이고 책임 있는 정치 주체가 나올 수 있을까. 


 

선거제도 개혁 이후 양당제가 아니라 자민당일강(一强) 구도가 강화된 일본
 

  선거제도보다 조직의 중요성을 알려주는 사례로 일본의 1994년 선거제도개혁을 들 수 있다. 알려진 것처럼 일본은 자민당이 계속 집권하는 일당우위제(Predominent-party system)이다. 일본은 1994년 한 선거구에서 2-3인을 선출하는 중선거구제시스템에서 1인을 선출하는 소선거구제와 비례대표제를 혼합한 제도를 도입했다. 궁극적 목표는 소선거구제를 통해 미국이나 영국처럼 양당 중심의 정권교체 있는 민주주의를 만드는 데에 있었다. 1996년 새로운 선거제도가 실시되며 제1 야당이었던 일본사회당(日本社会党)이 몰락하고 일본민주당(日本民主党)이 창당·성장하며 2009년 마침내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드디어 양당 중심의 정권교체 있는 민주주의가 이루어지는 듯했다. 그러나 민주당의 집권기간은 3년3개월에 불과했고 정권운영은 실패로 끝났다. 민주당은 자민당에 대항하기 위해 비(比)자민세력이 모두 합쳐진 취약한 지지기반과 허약한 정당조직을 가진 <선거용 정당>이었다. ‘격차 해소’, ‘아동수당’ 등의 슬로건을 통해 일시적 바람으로 집권은 가능했지만 자민당 같은 통치능력을 발휘하거나 위기 국면에 당을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없었다. 이후 자민당은 다시 집권당으로 복귀했고 자민당일강(一强)구도가 강화되며 아베(安部)수상의 유례없는 장기집권이 이어지고 있다. 반면 민주당은 당세가 급격히 위축되고 이합집산을 거듭, 자민당과 경쟁할만한 정당으로 자리 잡고 있지 못하다. 
 
  당시 중선거구제에서 소선거구비례대표제로의 개편은 분명 군소정당에게 불리한 내용이었다. 당조직이 허약했던 사회당·민주사회당(民主社会党) 등의 정당들은 이합집산을 거듭하며 사라졌다. 반면 창가학회(創價學會)라는 종교조직에 기반해 40만 넘는 당원수·500∼700만 고정표·튼튼한 당조직을 가졌던 공명당(公明党)은 현재까지 건재할 뿐 아니라, 1998년 이후 자민당과 연립파트너가 되었다. 자민당이 공명당을 파트너로 선택한 이유는 점점 약해지는 자민당의 지지기반을 공명당 조직으로 보완하기 위해서다. 일본공산당(日本共産党) 역시 당원수가 20만 명을 넘을 뿐 아니라, 정당국고보조금을 거부해도 자체사업과 당비만으로 자민당보다 더 수입이 많은 강한 정당임을 과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2000년대 이후에는 과거 공산당을 배척해왔던 다른 야당들로부터 선거연대의 파트너가 되고 있다. 이 역시 조직력이 중요한 이유 중 하나다.  

 

약자에게는 강한 정당조직이 필수  
 

  우리는 흔히 시민의 정치 참여를 확대해야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참여하는 시민들이 각종 정치 쟁점과 이슈를 판단하고 이해하는 데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더욱이 현대사회에서 다루는 이슈들은 갈등적이고 복잡하다. 따라서 시민들이 정보를 선별하고 판단할 수 있도록 하는 조력자이자, 그들의 이익과 열정을 집약하는 정당과 노조와 같은 매개 조직은 반드시 필요하다.  


  일반적으로 보수정당은 당보다 의원 개인들의 자율성이 크다. 자신들의 지지집단이 중상층이기 때문에 조직적으로 보호할 이유가 적다. 그에 비해 노동자나 사회하층을 대변하는 정당에게는 ‘강한 조직’이 중요하다. 사회적 약자일수록 정치에 참여할 만한 정신적·물질적 여유가 부족하기 때문에 이들의 참여비용을 절약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따라서 이런 정당일수록 마을과 직장 등 사회 전반에 작은 공동체까지 당원들과 잘 정비된 정당조직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리고 당원조직-활동가-당관료-지도부라는 유기적 조직체계와 엄격한 내부 규율을 가진 경우가 많다. 강한 조직이라야 아래로부터 만들어지는 수많은 요구들을 몇 개의 단순한 대안으로 집약해 공적 논의를 이끌어 낼 수 있고, 상대 정당에 맞서는 정책을 효과적으로 실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민주주의는 1인1표의 권리만 평등할 뿐, 권력에 접근할 수 있는 자원은 평등하지 않다. 더군다나 강한 국가 관료집단과 기업이라는 거대 조직의 영향력이 막강한 사회다. 시민들이 개인으로 참여하고 투표하는 것만으로는 사회적 강자들에 맞설 수 없다. 대항할 수 있는 유기적 조직은 필수적이다. 정당이 약자 보호라는 스스로 내건 가치와 정체성이 빈말이 되지 않으려면 강한 조직으로서 자신들의 지지집단과 조직을 통합해내고, 선거에서 승리해 책임 있는 통치 권력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선진 민주주의 국가에서 사민주의정당이나 노동자정당이 발달하고 사회를 조금 더 평등하게 만든 힘이었다. 

 

한국 정당 조직의 허약함 
 

  민주화 이후 한국의 대부분 정당들은 선거 때만 되면 민생을 이야기하고 비정규직 해소를 주장했으나, 한국사회의 불평등은 더 심각해졌다. 여러 원인이 있겠으나, 무엇보다 ‘서민’과 ‘약자’의 이해를 대변하겠다는 정당들조차 가난한 보통 시민들 속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조직이 허약하다는 점도 원인 중 하나다. 
 

  서민보호를 주장하는 정당들은 선거 전에 신장개업하듯 창당하고, 선거는 정당이 아닌 사적 인맥의 캠프가 주도한다. 선거 후에는 승리한 캠프가 청와대에 입성해 정치를 주도하는 반면, 집권당은 허수아비처럼 책임이 취약한 통치 집단이 된다. 물론 선거에서 패배하면 다시 합종연횡을 거듭한다.  
  
  소위 진보정당의 경우도 한 때 한국 정치에 신선한 충격을 주기는 했지만, 내부 문제로 사회 속에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본인들이 대표하고자 하는 노동자나 사회적 약자들의 지지를 받기보다 오히려 수도권 중심의 교육받은 중산층의 허약한 지지에 의존해왔다. 그러다보니 소수 유명한 정치엘리트에게 의존하거나, 선거제도 변화를 통해 기회를 가지려 하고 있다. 그러나 정당 스스로 강해지는 노력보다 제도 효과에 의존해 과연 유권자들의 신뢰를 얻고 유의미한 정치세력으로 자리 잡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최근 각종 비례정당이 난립하며, 이번 선거 결과가 기대와 다른 성적표를 받을 수도 있다는 전망은 어쩌면 예정된 불운인지도 모른다. 

 

  어떤 선거제도든 조직이 강한 정당에 유리하다. 이상적 제도가 도입된다 해도 그 혜택을 향유할 기회는 제대로 된 정당을 만든 이후 가능하다.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거나 노동정치를 꿈꾸는 사람들이, 더 확실한 <비례대표제>를 도입해야한다는 주장보다 조직이 강한 정당을 만드는 노력에 집중했으면 좋겠다. 비록 더디고 어려운 일이지만. 강한 조직 없이 연동형비례대표제도든 어떤 제도든 한국 민주주의의 구원투수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박상훈. 2015.『정당의 발견』. 후마니타스.  

 

 

정혜윤(한국노총 중앙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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