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영 매일노동뉴스 기자
“나는 평범한 이웃의 그러나, 동시에 평범하지 않은 그들의 삶에 제대로 아파하고 있나.”
2007~2008년쯤이었던 것 같다. 한 책을 읽다 이 문장을 발견하고 그 위에 형광펜을 그었다. 나의 10대는 지극히 평범했고, 20대는 평범을 극도로 거부했다. 심지어 좋아하는 노래나 연예인이 인기를 끌기 시작하면 싫어졌고, 의식적으로 독립영화만 쫓아다니며 봤다. 뭔가 남과 다름에 만족감을 얻고 으스댄 것 같다. ‘평범하다’는 곧 특색이 없다, 매력적이지 않다, 특별하지 않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색깔로 치면 무채색의 느낌이랄까.
그래서인지 기자가 되고 나서도 내가 평범한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란 생각에 만족감을 느꼈다. 적어도 내가 만나는 사람은 평범한 사람이, 그러니깐 뉴스에 나올 정도의 특별한 사람들이라 생각했다. 그리던 어느 날 저 글귀를 만났다.
평범을 지극히 거부하던, 열정으로 가득했던 꼬마 기자에게 저 문장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너 뭔가 대단히 착각하고 있구나’라고 질책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네 기사가, 네 삶이 얼마나 이 땅에 발 닿지 못하고 있는지 알기는 아냐고 묻는 것 같았다. 허황되게 공중에 붕붕 떠 있는 것을 아냐고 혼내는 것 같았다.
촛불을 든 평범한 사람들로 인해 우리사회는 혁명이라 일컬어질 만큼의 변화를 만들었다.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후퇴된 것을 되돌리고자 했다. 아니 오랜 세월 후퇴된 만큼 기회가 왔을 때, 변화의 장이 열렸을 때 몇 걸음 더 진전시켜 나가야 한다고 했다. 조바심도 냈다. 갑자기 찾아든 변화 앞에 그간 참아왔던 울분과 분노, 눅눅히 쌓여 있던 숙제들과 바람, 기대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촛불의 힘으로 높은 곳에 오른 이 역시 그 목소리에 귀를 열고 이렇게 하겠다, 저렇게 하겠다 약속했다. 과감한 걸음도 보였다.
그러나 서로가 닿고자 한 목적지가 달랐을까. 아니면 이미 공고해질 대로 공고해진 구조 탓일까. 수많은 걸림돌이 나타났고 저항은 거세 갔다. 특정세력의 대표자가 아니니 한계도 있었을 테다.
누군가 그러더라. 비정상의 정상화라고. 헌데 이 말은 그때가 아니라 지금 우리사회에 필요한 말이 아닐까. 촛불을 들었던 평범한 이들이, 이제는 자신들이 세운 권력 앞에 섰다. 공공부문 비정규 노동자들이 전국에서 서울로 모여들었다. 제대로 된 정규직화를 하라고, 처우를 개선하라고. 비정상을 정상화하는 외침이다. 우정노동자들은 더 이상은 일하다 죽기 싫다며 몇 년째 절규를 보내고 있다. 경제가 어렵다, 절체절명의 시기니 함께 이 고비를 넘어가자며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일한 이들을 저임금의 불안한 일자리로 내몰았다. 인력을 줄이고 노동강도를 높였다. 나라는 경제대국으로 우뚝 섰는데 평범한 이들의 절대다수는 고용불안에 가난을 답습해야 하는, 이 비정상을 정상화하자는데 우리사회는 물에 빠진 사람 건져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식이라는 차가운 시선을 보내고 있다.
전국에서 모인 공공부문 비정규 노동자는, 자식을 먹여 살리느라 한평생 일한 우리의 어머니, 하루 24시간 격일로 밤잠을 설치며 경비를 서는 우리 아버지, 더운 여름 펄펄 끓는 불 앞에서 몇 백인분의 밥을 하는 우리 이모, 정규직과 똑같은 일을 하면서도 월등히 적은 임금에 고용불안을 겪으며 우리사회의 불합리성을 온몸으로 겪고 있는 바로 우리의 이야기다.
언론은 연일 노동자들의 파업으로 학생들이 빵과 우유로 급식을 대신한다고 떠들어댄다. 갈라치기만큼 치졸하고 비열한 것은 없다. 어느 부모가 이런 기사를 보고 그저 쿨할 수만 있겠나. 하지만 가끔은 ‘기꺼이’의 마음을 조금만 발휘한다면 어떨까. 지금 우리는 평범한 이웃의 그러나 동시에 평범하지 않은 그들의 삶에 제대로 아파하고 있나. 자문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