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8일 동네 병원에 갔다가 ‘휴진’ 표시를 보고 발길을 돌린 분들이 있을 것이다. 의대 정원 증원 백지화를 요구한 의사협회가 18일 전국 병·의원의 집단 휴진을 선포했다. 전공의 역할이 상대적으로 컸던 대형병원의 의료대란이 동네 개원의까지 확산되어 국민의 생활에 불편을 초래하고 있다.
사실 동네 병원의 휴진률은 높지 않지만, 대형병원들의 휴진을 선포하고 범의료계 기구가 출범하는 등 기류가 불안하다. 정부는 출구를 막은 채 엄정 대응하겠다는 방침이다. 의료공백이 장기화되는 가운데 책임지는 자가 없으니 고래 싸움에 새우등만 터진다.
알맹이를 잃어버린 의-정갈등
수개월째 이어지는 의-정 갈등의 본질이 무엇일까? 의대 정원 확대는 소아과 오픈런, 응급실 뺑뺑이, 아산병원 간호사 사망사건 등을 겪으며 지역·필수진료과 문제를 해결하자는 게 목적이었다. 수년간 동결되었던 의사 수를 늘리고 의료개혁을 추진하자는 게 시작이었는데, 지금 의사와 정부는 무엇을 놓고 대립하는 것일까?
우리나라 국민건강보험법은 국민이 모든 의료기관을 이용할 수 있도록 보장하고 있다. 법적으로 강제성이 있는 ‘당연지정제’를 채택하고 있는 유일한 나라다. 하지만 국민은 의료기관을 이용하고 의사에게 진료를 받는 행위에 있어서 자유롭고 공평하다고 느끼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의사 수가 부족하다는 점 특히, 지방에 살수록 의료접근성이 떨어진다는 것은 어려운 논문과 통계를 통해서가 아니라 매일 체감하고 있는 의료현실이다.
그간 ‘수가’ 등 재정적 보상으로 공급자를 유인하는 정책을 펼쳐 왔지만, 여전히 의료공급자들은 이른바 돈이 되는 곳으로 몰리고 있다. 국민은 의사 수 확대, 지역필수의료 강화, 그리고 의료의 공공성을 요구하고 있다. 의사 집단은 절대적인 수의 부족이 아닌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며 남 탓을 한다. 그 사이에서 관망하던 정부는 올 2월 갑작스럽게 의대 정원 2,000명 확대를 발표했다.
사실상 병원협회의 숙원을 수용한 것이지만, 국민으로서도 반가운 소식이었다. 하지만 의사 수 확대가 지역·필수의료 강화로 연결되지 못하면서 공공성도 담보하기 어려운, 미숙한 정책으로 오히려 의사단체에 불만의 빌미만 주고 말았다. 지금은 서로 물러설 수 없는 강 대 강의 싸움이 되어버린 것이다.
당사자를 배제한 정부의 일방통행, 파국을 부른다
윤석열 정부는 주요 정책추진에 있어서 당사자의 목소리를 귀 기울여 듣지 않는다. 의대 증원만이 아니다. 정책 대상자, 이해관계자를 이기적인 집단으로 고립, 악마화하면서 의사결정, 거버넌스에서 배제하거나 권한을 약화한다.
지난 2월 정부가 의대 증원 숫자를 발표했을 때 많은 단체는 입장표명을 조심스러워 했다. 총선을 코앞에 둔 상황이라 여러 정치적인 계산이 있는 게 아닐까, 조금 지켜보자는 게 중론이었다. 적어도 문재인 정부 시절 400명 증원을 두고도 의사단체에 백기 투항했던 부끄러운 과거와는 달라야 한다는 절박함도 있었다. 이번 기회에 콧대 높은 의사들의 이기심을 꺾어버려야 한다는 여론도 의식하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의사 수 확대에는 찬성하지만, 대화 창을 닫아버린 정부의 태도에는 분명 문제가 있다. ‘건폭’과 ‘대기업 정규직노조’ 이익집단으로 매도되면서 비슷한 양상의 탄압을 받았던 지금 노동계의 처지가 오버랩되기도 했다. 이해 당사자 한편을 이렇게 매도하는 방식, 오랜 시간 동안의 숙의와 연구를 무시하는 처사, 정교하지 못한 정책, 예상되는 사회적 파장에 대한 외면, 많은 점에서 비슷한 경로다.
윤 정부가 공언했던 연금, 교육, 노동 3대 개혁 등 주요 정책추진 과정에 갈등과 혐오가 이어지다 보니 피로가 누적된다. 정말 대화를 해야 한다. 병원 노동자와 환자들의 피해가 크고 사회적 비용 낭비가 심각하다.
의료서비스 수요자인 노동자도 목소리를 내야
전공의 공백으로 인한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한편에선 건강보험 재정을 쏟아붓고 있다. 지난 2월 중앙사고수습대책본부 비상 진료 대책 발표에 따르면 건강보험 지원방안으로 매월 1,882억 원의 건보재정 사용을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가 심의·의결하고 있다. 누적된 액수가 6월 말 현재까지 8,003억+α에 달한다. 한해 건강보험 지출규모가 90조 원인데 1%가 작금의 의료 재난을 수습하는데 사용하고 있다.
노동자와 국민은 의료이용에 불편을 겪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 매달 건강보험료로 의료공백을 메우고 있어 이중적인 부담을 지고 있다. 우리는 그저 의사 휴진 동안 아픈 가족이 없기를 바라는 것 외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윤석열 정부가 주요 보건의료, 건강보험 정책 거버넌스에서 한국노총을 배제하고 있어 직접적인 개입은 어렵다. 가장 최근에는 의대 증원과 필수의료개혁을 논의하는 ‘의료개혁특별위원회’에도 노동자를 대표해 ‘새로고침노동자협의회’가 들어갔다. 그렇다고 한국노총 조합원과 노동자의 입장 대변을 위한 창구가 정부위원회에 국한될 필요는 없다. 국회 등 다른 통로를 활용해 한국노총의 입장을 발표하고 목소리를 내야 한다.
지난 6월 17~19일 동안 한국노총 현장 정책위원 ‘우문현답’은 정책 설문조사를 시행했다. 의사 집단이 의대 증원에 반대하여 진행한 진료 거부, 집단 하직, 휴진 등의 집단행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에 71.7%가 ‘집단행동을 중단하고 당장 현장으로 복귀해야 한다’고 응답했다.
이어 한국노총이 어떤 해결방법을 제시해야 하나에는 ‘시민과 이해관계자 참여로 사회적 대화 기구 구성’ 77.4%, ‘정부 의대 증원안 백지화 후, 의-정 대화로 해결’ 20.8%로 응답했다. 그 외 기타 의견으로 ‘노동계라도 중재에 나서야’, ‘의료계 종사자의 더 큰 목소리 필요’, ‘당사자 없는 정부 일방통행에 대해 노동계 입장 표명’ 등을 제시했다.
의-정은 한걸음씩 물러서고 국회는 적극 개입해야
이 싸움의 끝에 어떤 결론이 나든 의료현장이 다시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을까? 수개월 동안 환자를 외면한 의사는 온전하게 환자와 교감하며 진료를 할 수 있을까. 불안과 고통을 받았던 환자는 의사를 다시 신뢰할 수 있을까. 병원에서 의사와 간호사, 다른 노동자들은 한팀이 되어 오로지 환자만 생각하며 돌볼 수 있을까. 승자도 패자도 없는 갈등이 당분간 이어질 것이다.
대한의사협회 산하 범의료계 특별위원회인 '올바른 의료를 위한 특별위원회'의 첫 회의가 22일 열려 공동의 행동을 모색하고 있다. 한국환자단체연합회도 7월 4일 '의사 집단휴진 철회 및 재발방지법 제정 촉구' 총궐기대회를 열 계획이다. 의료계 종사자 노조인 보건의료노조는 정부와 의사단체를 상대로 전면 투쟁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갈등을 종결할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다. 의사는 백지화, 원점 재논의 요구를 중단하고 의대 증원이 국민의 뜻임을 수용해야 한다. 정부는 의사들을 대화로 끌어내기 위한 출구전략을 마련해야 한다. 이제 국회도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필요하다면 국회 내에 의료개혁 공론화를 추진하기 위한 기구를 여야합의로 구성해야 한다.
당사자 만의 문제가 아닌 국민이 개입할 수 있도록, 하얀거탑이 완전히 붕괴하기 전에 정치가 작동해야 한다. 제2의 코로나, 재난은 예고 없이 엄습한다는 사실도 상기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