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아 한국노총 대외협력본부 실장
▣ 정전협정 서언
국제연합군 총사령관을 일방으로 하고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및 중국인민지원군 사령원을 다른 일방으로 하는 하기의 서명자들은 쌍방에 막대한 고통과 유혈을 초래한 한국 충돌을 정지시키기 위하여 서로 최후적인 평화적 해결이 달성될 때까지 한국에서의 적대행위와 일체 무장행동의 완전한 정지를 보장하는 정전을 확립할 목적으로 하기 조항에 기재된 정전 조건과 규정을 접수하며 또 그 제약과 통제를 받는 데 각자 공동 상호 동의한다. 이 조건과 규정들의 의도는 순전히 군사적 성질에 속하는 것이며 이는 오직 한국에서의 교전 쌍방에만 적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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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체결
서언에서 확인되듯 정전협정은 전쟁의 종료가 아닌 ‘충돌을 정지’하기 위한 협정으로, 이를 위해 ①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 설정 ②비무장지대 내 일체의 군사력 철거 ③외국군 및 무기 증원 정지 ④정전협정의 실시를 감시하는 군사정전위원회 및 중립국 감시위원단 설립 ⑤전쟁 포로의 석방과 송환 ⑥한국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하여 3개월 이내에 한 급 높은 정치회의를 소집한다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로써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가 만들어지고, 군사정전위원회 본부가 판문점에 설치되었으며, 스위스·스웨덴·체코슬로바키아·폴란드로 구성된 중립국 감시위원단도 구성되었다. 그러나 1953년 10월 미군의 한국 주둔을 허용한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되는 등 외국군 및 외국 무기의 증원 중단은 지켜지지 않았고, 1954년 총 15개국이 참여한 제네바회담 역시 아무런 해법을 제시하지 못한 채 종료되면서, 한반도는 무려 70년이라는 기나긴 시간을 ‘정전’ 즉 전쟁이 멈춘 상태로 유지되고 있다.
세계 역사에서 휴전 및 정전협정의 수명은 길어봤자 1년인 점을 보아, 한반도는 지구상에서 가장 오랜 기간 전쟁 상태로 남아 있다.
있는 듯 없는 듯한 정전협정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정전협정은 제대로 작동하고 있지 않다. 우선 바다 위에는 군사분계선이 없다. 정전협정의 내용대로 길어도 3개월 안에 정치회의가 소집되고 평화협정이 체결될 것으로 예측했기 때문에, 굳이 복잡하게 바다 위 분계선은 규정하지 않았다. 이는 남북관계가 악화할 때마다, 서해상 군사적 긴장과 충돌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된다. 물론 서해상 충돌 때마다 언급되는 NLL(Northern Limit Line)이 있기는 하지만 이는 유엔군 사령관이 월북을 방지하기 위해 임의로 정한 북방한계선으로, 정전협정에 명시된 경계선이 아니다. 당연히 늘 다툼의 소지가 있다.
또한, 정전협정 위반을 감시하는 군사정전위원회와 중립국감독위원회는 중단된 지 오래되었다. 군사정전위원회는 1994년 이후 열리지 않고 있고, 심지어 중립국 감독위원회에 참여했던 스위스·스웨덴·체코슬로바키아·폴란드 중 체코슬로바키아는 두 나라로 나뉘기까지 했다. 불안정한 정전체제인 한반도에는 이를 감시할만한 기구조차 없는 상황이다.
한국이 정전협정 조인의 당사자가 아니라는 점도 심각한 문제이다.
1950년 한국이 미국에 작전통제권을 위임함에 따라, 정전협정에는 국제연합군 총사령관이자 미국 육군 대장인 마크 클라크와 조선인민군 김일성 최고사령관, 중국 인민지원군 팽덕희 사령원이 서명하게 되었다. 그나마 중국이 권한을 포기하면서, 정전협정에 손을 댈 수 있는 나라는 북과 미국만 남아 있으며, 당사자인 우리는 어떠한 제안도, 논의도 할 수 없는 기이한 상황이다.
불안정한 정전체제 위에 험악한 한반도 정세
21세기 들어 미국의 군사·외교전략은 중국과 러시아의 급격한 부상을 억제하기 위해 변화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미국은 한미동맹의 역할 변화를 강력히 주문하고 있다. 과거 대북 억제에 한정되었던 주한미군은 중국·러시아에 대응하는 역할로 변화되고 있으며, 한미동맹은 동아시아 지역 및 범세계적 차원의 전략적 이익을 위한 것으로 확대 중이다. 최근 한국의 외교가 그 어느 때보다 한미일 동맹 강화에 집중하면서 북, 중, 러와의 갈등은 계속 확장되고 있는데, 이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한 북의 핵 및 미사일 개발과 연이은 발사 실험 역시 한반도 정세를 매우 불안하게 하고 있다. 한미일 3국은 강력한 국제제재와 각종 군사적 대응에 나서고 있으나, 강대강 속에 오히려 정세는 더욱 불안해지고 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군사적 상호 대응으로는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어려워 보인다.
문제는 윤석열 정부의 진영편중 외교전략
윤석열 정부는 출범 직후부터 전 정부의 외교에 대해 ‘미·중 사이의 줄타기’라고 평가하며, ‘가치 외교’라는 이름 아래 대미 및 대일 외교에 모든 역점을 기울였다. 2022년 11월에 발표된 <한미일 프놈펜 공동선언>은 이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데, 한마디로 한국이 중국과 러시아 등 대륙을 견제하는 해양세력에 본격적으로 동참할 것을 선언한 것이다. 대륙에 위치한 나라인 우리가 대륙을 배제하고 봉쇄하는 해양세력 강화에 힘을 싣겠다는 이 합의는 사실 일본의 아베 전 총리가 창안하고, 2017년 미일 정상회담에서 채택된 내용이다. 미국이야 자국의 이익을 위한 전략이겠으나, 한국의 이익이 될지 매우 미지수다.
게다가 평화헌법 수정 등으로 군사 대국화를 꿈꾸고 있는 일본을 과연 신뢰할 수 있느냐는 문제도 남아 있다.
▲ 지난 2월 14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정전 70년 한반도 평화행동 출범대회: 전쟁을 끝내고, 평화로!'에서 참석자들이 손팻말을 들고 있다
이러한 복잡다단한 정세 속에서 우리는 정전 70년을 맞이하고 있다.
항시적인 갈등과 충돌의 위협을 당연하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70년이라는 긴 시간은 정전체제의 위험성을 잊게 만들고, 매일 닥치는 충돌의 위기를 마치 일상처럼 여기게끔 만들고 있다. 평화와 공존이라는 상식적인 단어는 적, 파괴, 타도와 같은 극단적인 단어에 묻히고 있는 현실이다.
평화는 모든 생존의 근본임을 다시 상기한다. 평화가 무너진 자리에는 우리 노동자와 같은 서민의 유혈과 고통이 남는다는 역사의 교훈을 새삼 돌이켜본다. 평화의 소중함을 기억하고, 평화를 지키기 위한 우리의 노력과 실천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때다. 또한, 자주권을 지키기 위한 노력도 함께 필요하다.
노조가 노조답기 위해 자주성의 원칙을 견지하듯이, 나라가 나라답기 위해서는 자주권을 갖고 있어야 한다. 70년 전 기형적으로 체결된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기 위해, 나아가 갈수록 첨예해지는 한미일-북중러의 대립 구도 속에서 그 무엇보다도 민족의 이익을 중심으로 한 자주권을 지킬 때 평화를 지킬 방법도 나올 것이다.
정전 70년이 평화의 소중함을 다시금 상기하고, 진정한 평화는 어떻게 만들 수 있을지를 진지하게 모색하고 고민하며 실천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전국 곳곳에서 ‘정전 70년 한반도 전쟁 반대 평화실현 서명운동’이 벌어지고 있고, 전세계 300곳 평화운동이 서울부터 저 멀리 남미 대륙까지 번져나가고 있다. 7월 22일, <정전 70년 한반도 평화대회>가 준비되고 있으며, 27일에는 국제토론회 등이 개최될 예정이다.
우리 노동자도 힘을 모아, 전국의 모든 노동자가 자주와 평화를 염원하고 실천할 때, 비로소 평화는 실현될 것이다. 윤석열 정부의 노동 탄압과 노동정책 후퇴에 맞서 싸우면서도, 우리 모두의 삶의 기반인 평화를 지키기 위한 작은 행동에 동참하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