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례 없이 혹독한 정부의 노조탄압이 펼쳐지는 국면 속에서도 내년도 최저임금 결정을 위한 심의는 진행됐다. 하지만, 정부가 노동조합을 부패집단과 범죄집단으로 규정하는 사상 초유의 상황에서 저임금 취약계층 노동자 삶의 개선을 바라며 최저임금 인상을 바랐던 것은 욕심이었을까.
지난 7월 19일 동이 틀 무렵 최저임금위원회는 제15차 전원회의 열고, 내년도 적용 최저임금을 결정했다. 최저임금은 표결을 통해 올해 대비 2.5% 인상된 시급 9,860원(월 환산 금액 2,060,740원)인 사용자 안으로 결정되었다. 이번 심의는 역대 최장기간인 110일간 진행되었다.
최초요구안 제시 이후 노사는 무려 8차례 수정안을 제출하였지만 결국 이견의 폭을 좁히지 못한 채 공익위원이 심의촉진구간을 제시하게 되었다. 공익위원은 심의촉진구간의 하한액은 2.1%, 상한액은 5.5%로 터무니없이 낮고 좁게 정했다. 결국, 1만 원 이하의 인상률을 도출하기 위한 과정에 불과했다.
촉진구간 제시를 받기 전까지 노동계는 최초요구안의 요구율보다도 절반 이상 인하했지만, 사용자위원은 8차례 수정안을 제시까지 1%대를 넘지 않았다. 이처럼 공익위원들의 사용자 편향적인 촉진구간 제시에도 불구하고 한국노총 노동자위원은 최소한의 저임금노동자 삶의 질 개선이라는 본래 목적을 위해 촉진구간 내에서도 두 차례 수정안을 추가로 제시하였다.
그러나 공익위원들의 답변은 ‘노사표결’ 이었고 결국 최소한의 물가상승률도 반영하지 않은 사용자위원의 손을 들어줬다. 노·사·공이 모여 최저임금을 결정하는 최저임금위원회 내에서 최소한 법이 정하고 있는 결정 기준도 반영하지 않았다.
▲ "실질임금 삭감이나 마찬가지" 2024년도 적용 최저임금 결정 직후 기자브리핑을 하는 류기섭 한국노총 사무총장
무너진 최저임금위원회 공정성, 자율성, 독립성
올해 최저임금위원회 활동과정에서 양대노총은 노동자위원 부재의 불리한 여건 속에서 심의를 시작했다.
지난 5월 포스코 사내 하청 노동자의 투쟁 지원을 위해 고공농성 중이던 김준영 노동자위원이 경찰의 폭력 과잉 진압으로 구속된 이후 최저임금위원회의 노·사·공 동수원칙이 깨진 채 운영되었다.
최저임금위원회는 이러한 노동자위원 부재 상황에 대해 적극적인 조처를 하지 않았다. 김준영 노동자위원 구속 이후 최저임금위원회 차원의 대안 마련 조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박준식 최저임금위원회 위원장은 현행 최저임금위원회 운영규칙을 개정해 김준영 위원 공석에 대한 ‘대리표결’ 규정 마련을 약속했다. 노동계 입장에서는 김준영 위원 부재는 대단히 아쉬운 일이지만, 대리표결로나마 노동계의 불리한 심의를 방지한다는 차원에서 운영규칙 개정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난데없이 정부가 이 과정에 제동을 걸고 나서며, 최저임금위원회가 제시한 운영규칙 개정을 무력화했다. 최저임금 법정 심의기한이 열흘 남짓밖에 남지 않았던 지난 6월 16일, 고용노동부는 김준영 위원을 강제 해촉하고 새롭게 위촉한 김만재 금속노련 위원장마저 공동정범이라는 대단히 무례하고 자의적인 판단으로 신규 위원 위촉을 거부했다.
이뿐만 아니다. 최저임금 심의가 한창 무르익을 때, 정부 고위인사 발언을 인용해 "최저임금을 결정하는 산식에 들어가는 경제성장률과 물가상승률, 기타 여러 경제 상황 등을 고려해봤을 때 1만 원을 넘지 않는 범위가 될 것"이라며 구체적인 액수인 '9800원 선'을 언급한 언론기사가 나왔다. 보도는 대단히 구체적이었으며 이것은 정부가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것으로 보인다. 최저임금위원회의 중립성은 매우 흔들렸다. 최저임금위원회는 최저임금인상을 위한 논의가 아닌 노정갈등이 촉발하는 심의장으로 변모했다.
사상 최장기간 심의지만, 너무나 지지부진한 논의가 이어지게 되었다. 이는 정부가 개입하지 말아야 할 최저임금위원회에 깊게 개입하여 비롯한다. 최저임금은 그 어떤 외압과 회유를 막고 굳건하게 최저임금의 본래 목적에 맞는 심의를 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 그러므로 최저임금위원회 구성상 노·사·공 위원 이외의 그 어떤 이유라도 최저임금 결정의 판을 흔드는 것은 대단히 부적절한 처사다. 이처럼 올해 최저임금위원회는 공정하지 않고 독립적이지 않으며 자율성마저 상실한 위원회로 전락해 버렸다.
▲ 사용자위원(안)에 공익위원의 표가 몰렸다
영세 소상공인과 중소기업 노동자들의 눈과 귀를 가리는 업종별 차등적용 주장
사용자위원은 올해도 최저임금의 업종별 차등적용을 주장했다. 사실 최저임금법에는 최저임금 심의 내용 중 하나로 사업의 종류별 구분적용, 즉 업종별 차등적용에 대해서 심의할 수 있는 근거조항이 있다. 제도 시행 첫해 저(低)임 그룹과 고(高)임 그룹으로 나누어 업종별 차등적용이 시행되었지만, 실제 현장에서 적용하기가 쉽지 않고 혼란을 초래한다는 이유에서 사실상 사(死)문화된 조항이다.
사용자위원은 더 나아가 음식·숙박업, 택시업, 편의점업 세 가지 업종에 대해서만 차등적용을 해달라 주장했다. 하지만, 사용자위원들이 제기한 업종은 분류상 규모가 일치되지도 않고 현장의 더 큰 혼란을 일으킬 수 있다. 최저임금 제도 취지를 망각하는 업종별 차등적용은 오히려 영세 소상공인과 중소기업 노동자를 기만하는 것에 불과하다.
실제로 우리나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를 통틀어 자영업 비율이 가장 높은 수준이다. 오죽하면 “퇴직하면 치킨집”이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다. 현재 우리나라 자영업자들이 고통받는 주된 원인은 각종 가맹수수료, 카드수수료, 임대료, 원가 납품단가 인하, 일감 몰아주기 등 수도 없이 많은 불공정 거래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최저임금’ 인 듯 호도하고 있다.
최저임금위원회, 제도 취지와 목적 확립을 위해 노력해야
최저임금제도는 엄연한 87년 노동자 대투쟁의 산물이다. 노동자 임금의 최저수준을 보장함으로써 빈곤을 예방하고 사회불평등과 양극화를 해소하는데 가장 확실한 국가 안전망이다.
최저임금제도 시행 40년이 다 되어가는 올해 심의 과정에서 벌어졌던 일련의 과정은 근본적으로 최저임금위원회 역할을 재수립해야 하는 시점이 아닌가 생각한다. 최저임금제도 취지 목적이 저임금노동자의 생활 안정을 통해 국가 경제의 발전을 추구하는 것에 있지만, 최근 몇 년간 이러한 제도 취지 목적을 망각한 채, 경영상 어려움이나 경제 위기를 ‘최저임금 탓’으로 주장하는 사용자위원의 안을 최저임금위원회에서 결정하고 있다.
반복된 최저임금위원회의 기울어진 심의 기준과 불합리한 운영 과정은 과연 최저임금위원회에 독립성, 자율성, 공정성이 있는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최저임금이 생계유지를 위한 필수 조건인 저임금노동자는 과연 최저임금 논의에 대해 신뢰할 수 있을까?
이제 그 답은 정부와 최저임금위원회가 내놓을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