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욱영 한국노총 정책1본부 국장
명함이 없는 여성들을 만나다
경향신문 젠더기획팀은 일을 쉰 적은 없지만, 사회에서 ‘일’로 인정하지 않았기에 명함이 없는 여성들의 목소리를 찾아 기사화하고 이를 묶어 책으로 펴냈다. <우리가 명함이 없지 일을 안 했냐>는 집안일과 바깥일을 오가며 평생을 ‘N잡러’로 살아 왔던 여성들, 이름보다 누구의 아내나 엄마나 불린 여성들에게 명함을 찾아주고자 시작되었다. 남대문시장 국숫집 ‘훈이네’ 사장님을 시작으로 전업주부들, 농부와 광부, 살림과 육아를 하는 틈틈이 공부하고 스펙을 쌓아 자신만의 길을 개척한 여성들, 엄마의 노동을 기억하고 기록하는 여성들까지 전국에서 많은 여성들을 만났다.
이 책은 또한 그저 단순한 인터뷰집이 아니다. 데이터와 통계를 통해 이들의 노동이 저평가된 구조적 맥락을 짚고, 그 가치를 재조명하며 당시 한국의 현대사적 사건들도 살펴본다. 기사 연재 당시는 물론, 소셜 펀딩 1,442%를 초고속 달성하며 많은 사랑과 출간 요청을 받았고, 드디어 단행본으로 정식 출간되었다. 2023년 2월 경향신문 젠더기획 특별취재팀의 ‘우리가 명함이 없지 일을 안했냐’는 제54회 한국기자상 기획보도 부문 수상작으로도 선정됐다.
언니들의 멋진 인생
누구의 딸로 아내로 엄마로 살아온 여성들의 고생스러운 인터뷰는 흔하고 누구나 알만한 이야기이기에 중요하지 않다고 여겨질 수도 있다. 하지만 다섯 가지 출근길의 모습을 담은 인터뷰집을 읽다 보면 어쩌면 뻔할 수도 있는 인생의 고비고비, ‘나쁜 일이 파도처럼 몰려왔음에도 도망가지 않고’, ‘내가 이런 용기가 있구나’, ‘나라는 사람이 이렇게 힘이 될 수 있구나’라는 생각으로 더 많은 고민과 자신감으로 살아온 언니들 모습에서 따스한 응원의 힘을 얻게 된다. 차별받고 희생을 강요당하며 겪었던 수많은 불평등 속에서도 자신이 했던 일들을 자랑스러워하는 여성들의 인터뷰는 저마다 살아온 세월 속에서 연마된 자신만의 목소리로 전해져 온다.
어쩌면 이 책은 그저 단편적인 이야기일 뿐 수많은 할머니, 엄마, 언니의 이야기가 주변에 잠자고 있을지 모른다. 이제 수십년 동안 묵묵히 궂은일을 도맡아온 여성들이 제대로 된 처우를 받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단순히 숭고한 희생으로 치부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일이자 나의 일이 될 수도 있음을 인식하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은 어떨까. 삶 자체가 명함이었던 그녀들의 인생을 읽으며 우리는 우리의 삶과 일을 반추하고 배우고 싸워나가게 될 것이다. 그 자체로 멋진 언니들인 그들에게 명함 따위는 애초에 필요 없었던 것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