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경
“김선경씨는 결혼해도 계속 회사를 다닐건가요?”
2001년 졸업을 앞둔 겨울, 면접 질문에 대답을 잘(?) 한 덕에 입사동기 12명 중 유일한 여성으로 합격, 21년째 한 회사에 ‘결혼 후’에도 충실하게 근속중이다. 누구보다 강한 슈퍼우먼으로 살 자신이 있었는데, 일하는 엄마가 되고 보니 현실은 생각과 달랐고, 아이가 엄마 손을 가장 가까이에 필요로 할 때 그렇게 할 수 없는 상황이 마음 아리게 고통스러웠다. 여전히 늘 옆에 있어 주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그래도 삶에 최선을 다하는 엄마를 보며 아이가 스스로 성장하기를 기대하며 열심히 회사를 다니고 있다.
# 회사 다니는 엄마라 미안해
“으아아아앙~~~ 아아아아앙~~ 앙앙!”
밤 10시가 넘은 시간. 퇴근하며 아파트 단지에 들어서니 동네가 떠나가라고 아이 우는 소리가 들린다. 집이 가까워질수록 그 소리는 더 커지는데 내딛는 걸음에 불안감이 함께 실려 온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순간 불안은 확신이 되고, ‘이거 큰일 났다’ 철렁 내려앉은 가슴으로 집으로 뛰어가 문을 열었다. 연로하신 시부모님과 남편이 눈물로 범벅이 된 아이를 끌어안고 어쩔 줄 모르며 함께 달래고 있지만 아이는 최선을 다해 울기만 할 뿐 멈추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어 보인다.
‘아 어떻게 하지’ 얼른 신을 벗고 달려가 “정원아~” 하고 부르니 완숙 토마토 같이 온통 벌게진 얼굴을 하고는 눈물 줄줄 흐르는 눈으로 날 본다. 그러더니 갑자기 언제 울었냐는 듯 세상 다 가진 듯한 함박웃음을 지으며 품에 안겨서는 연신 방긋방긋 웃는다. ‘우리 아가 엄마가 그리웠구나...’ 퇴근하고 1시간은 그 상태로 서서 우는 걸 달랬다는 남편은 허탈해하며 드러누워 버린다.
14년이 지난 지금도 그날을 생각하면 울음 가득한 눈으로 날 보고 웃던 아이 얼굴이 생생해 눈물이 고인다. 엄마한테 와 준지 100일 밖에 안 되었는데 젖도 안 뗀 너를 두고 회사 가야 되는 엄마라 엄마가 정말 미안했어.
# 그래도 아기 먹을 건데
내가 입사 당시에만 해도 우리 회사는 남성 위주의 군대식 조직문화가 넓게 자리 잡고 있었고 여성 선배들 수도 많지 않았다. 육아휴직은 사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나 역시 나의 부재기간 동안 내 업무 부담까지 짊어지고 있을 팀과 동료에 대한 미안함에 휴가기간만 마치고 회사로 복귀했다. 잘 나오는 모유를 강제로 끊기는 너무 아까워 회사에서 유축을 하기로 계획하고 성능 좋은 유축기와 함께 복직을 했다.
복직 첫날, 시간이 지날수록 모유는 차오르는데 유축 가능한 장소가 없어 정말 난감한 상황이 벌어졌다. 결국 적당한 장소는 화장실 밖에 없었고, 화장실 칸에 들어가서 양변기 뚜껑 위에 유축기를 놓고 유축을 해서 집으로 가져갔다. 그래도 아기 먹을 건데 울컥한 마음이 들어 주변 몇 분에게 얘기를 드렸고 총무부서로 전달이 되어 얼마 후 복도 한 끝에 자바라 문을 설치한 임시 공간이 마련되었다. 그동안 그런 장소가 있을 필요가 없었던 상황임은 이해하지만 막상 내가 닥치니 퍽 난감했다. 다행히 그 이후 회사는 대상자가 있건 없건 모성을 위한 공간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 엄마 회사 이제 그만 끊으면 안 돼?
아이가 말을 배운 직후 나에게 가장 많이 했던 말은 “엄마 회사 이제 그만 끊으면 안 돼? 회사 가지 마”였다. 출근 시 현관 앞까지 따라 나오면서 ‘혹시나 오늘은 엄마가 회사 안가고 나랑 같이 있어 줄까’하는 일말의 기대감으로 “엄마 회사 가지 마”를 부르짖는 아이를 두고 나는 매일 현관문을 닫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면 아이는 내 모습을 놓칠까 바로 창문으로 다다다다 뛰어가 내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든다. 아이를 사랑으로 보듬어 줄 시간과 바꾼 직장의 시간은 내 인생에서 어떤 가치인지 생각이 많아지는 날들이었다.
# 엄마 학교를 못가겠어요
“어멈아, 정원이가 학교를 못가겠다는데 어떻게 할 수가 없구나”
초등학교 입학 후 얼마 되지 않아 아이가 등교하고 있어야 할 시간에 아버님께 연락이 왔다. 내가 팀에서 진행하는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어서 잦은 야근을 하던 시기였다. 바쁜 와중에도 난 아이에게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이 마음은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럴 때마다 휴가를 매번 내고 같이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우선 수습은 해봐야겠기에 아버님께 아이와 회사 앞으로 와 주시기를 부탁드렸다.(회사가 집에서 도보 가능한 거리에 있었다.)
만나면 큰소리로 혼을 내야 하나? 달래서 학교 가라고 하면 과연 학교를 간다고 할까? 회사 앞으로 오는 시간 동안 심란하게 고민하던 중 책상 위에 있던 컬러집게세트가 보였다. 5개였는데 맨 앞에 한 개를 빼고 눈과 입을 그리니 애벌레처럼 보였다.
회사로 찾아 온 아이는 할아버지 손을 잡고는 울다만 눈으로 잔뜩 기가 죽어서는 눈치를 보면서 나를 올려다본다. 가슴이 미어졌지만 아이에게 가서 애벌레를 손에 쥐어주며 “정원아 애벌레가 널 지켜줄 거야. 힘을 내!”하고 안아줬다. 그러니 작은 손으로 집게를 꼭 받아 쥐고는 갑자기 기분이 좋아져서 학교에 가겠다고 한다. 하루는 넘겼지만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 할 지 고민이 되었다.
# 투입공수 미포함 비밀 야근 동지
프로젝트 기간 중에 늦게 귀가하는 기간이 길어지자 아이가 우울, 불안해하고 투정을 부리는 경우가 많아졌다. 고민하다가 선배님께 조언을 구하니 정 그러면 야근할 때 아이를 데려와 보면 어떻겠냐고 하셨다. 나는 내가 여직원이기 때문에 혹시라도 ‘쟤는 애 엄마야’라는 편견을 만들면 안 되니 내가 엄마임을 회사에 티 내면 안 된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아이의 우울감과 생떼가 심해져 모든 가족이 같이 피폐해졌고 ‘에라 모르겠다. 한번 데려가 볼까’하는 갈등이 생겼다.
퇴근해서 아이에게 “엄마 일하는데 같이 있어 볼래?” 하니, “응!!” 하더니 두 눈이 흥분되어 반짝거린다. 다행히 야근하는 장소는 회사 본사가 아닌 별도 사무실이었고 소수의 직원만 야근하는 경우가 많았다. 아이는 태권도장에서 끝나 도복을 입은 채로 밥버거를 하나 사 들고 손을 잡고 신이 나 콧노래와 함께 겅중겅중 뛰면서 따라온다. 조용히 있기로 약속하고는 화이트보드에 그림을 그리거나 비어있는 컴퓨터에 그림판을 띄워주니 약속한대로 조용히 그림을 그리면서 힐끗 보고 웃고, 작은 소리로 말시키고 웃고 한다. 콧노래를 부르며 밥버거도 맛있게 다 먹었다.
같이 있던 선후배님들은 감사하게도 나의 상황을 이해해 배려해 주셨다. 밤 12시까지 일하게 되는 날에는 마지막으로 같이 셔터를 내리고 나와야 했는데, 그조차도 무슨 놀이인 양 졸린 것도 참고 키득키득 즐거워한다. 그렇게 우리는 야근 동지로 함께 밤을 보내며 프로젝트를 마칠 수 있었다. 몇 년이 지난 후 그 시절의 기억을 물어보니 “엄마 우리 저기서 너무 너무 재미있었다. 그렇지? 참 재미있는 추억이었어요”라며 바빴던 엄마의 미안함을 아름다운 기억으로 바꿔주었다.
# 정원 엄마, 김차장입니다
나는 정원 엄마이면서 김차장이다. 엄마 노릇만 하거나, 직원 역할만 해도 될 때에는 그래도 해 낼만 했다. 그런데 정원이 엄마이면서 직원 역할을 동시에 해야 하는 순간도 불시에 찾아오는데 이 경우는 내 의지대로 이슈의 강약을 조절할 수도 없고 노력을 한다고 해서 항상 해결이 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온 팔다리가 묶여 꼼짝할 수 없는데 누군가에게 공격받는 기분이었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나아지리아 속담처럼 엄마 개인의 힘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경우가 허다했다.
‘여성이 일을 그만두는 것이 엄청난 복지체계가 없어서가 아니라 힘든 한순간을 견뎌낼 방법을 상상할 수 없어서’라는 어느 워킹맘의 말처럼 불시에 찾아오는 힘든 한순간에는 쌓아온 모든 커리어를 다 포기해버리고 싶을 만큼의 고통스러움이 있다. 그 순간의 고통이 덜어질 수 있는 환경이 된다면 많은 엄마들이 본인의 커리어를 지켜낼 힘을 얻을 수 있을 텐데 말이다.
# 엄마도 했으니 나도 할 수 있다
나의 엄마는 엄마 개인 생활은 포기하신 채로 모든 것이 아이들 위주인 완벽한 엄마로 나와 동생을 키워주셨다. 그래서 내 머릿속에 입력되어 있는 ‘엄마’라는 역할은 우리 엄마 같이 항상 옆에서 챙겨주고, 늘 맛있는 음식을 직접 준비해주며, 학교 다녀오면 항상 우리를 기다리다가 맞이해주는 진정한 밀착형 보호자였다. 그런데 정작 엄마가 된 나는 전혀 그렇지가 못해 스스로 불만족이었다. 항상 옆에 있어줄 수는 없었으며 음식을 직접 해 줄 시간도 없었고, 늘 아이가 기다리고 있는 집에 뒤늦게 들어가는 부족한 엄마였다. 스스로 충족되지 못한 모성에 대한 모든 불만족은 다 내가 회사를 다니기 때문에 생기고 있었고 불만이 커지니 나에게 일의 가치는 무엇인가를 자꾸 질문하게 되었다.
그런데 일하시는 엄마 아래에서도 잘 성장한 다른 엄마들과 대화할 기회가 있었고, 그 엄마들이 느끼는 일하는 엄마의 모습이 내 걱정처럼 부정적인 면만 있는 것이 아니란 걸 알게 되었다. 오히려 엄마가 목표를 이루고 성취해 가는 과정을 옆에서 경험한 것이 긍정적인 교육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요즘은 내 상황을 부정적으로 생각하기 보다는 되도록 아이에게 나의 사회생활을 많이 공유해주며 엄마의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를 주고자 노력하고 있다. ‘엄마도 잘 해냈으니 나도 잘 할 수 있다’는 용기를 가질 수 있도록 말이다.
# 내일도 출근하는 일상이 온다
엄마 초집착 껌딱지였던 아이가 이제는 중학생이다. 다른 집 아이들이 크면 다 변한다고 해도 내 아이만은 예외일 줄 알았다. 그런데, 아침마다 엄마가 안보일 때까지 울면서 손을 흔들었던 꼬마는 내 마음속에만 아리게 남아 있지, 정작 본인은 기억이 없다고 한다. 언제까지나 내 품에서 ‘엄마 회사 가지 마’를 외칠까 걱정이 되던 아이었는데 현실 세계에 눈을 뜨면서 ‘엄마가 직업이 있는 엄마라 나는 좋아요’, ‘엄마 연봉은 얼마나 되시나요’, ‘엄마가 자랑스러워요’ 하는 것을 보면 엄마가 일한다는 것을 받아들인 것 같다.
여전히 나의 워킹맘 생활이 수월한 것은 아니지만 아이는 나의 생각보다 빨리 자라고 있는 것 같다. 엄마가 바쁘지만 너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확신을 주고, 엄마도 노력해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아이도 열심히 일하는 엄마를 보고 스스로 점점 힘을 갖춰 성장해 가지 않을까 기대한다. 내일도 어김없이 출근하는 일상이 찾아오겠지만, 내 모습을 보고 자라날 아이를 위해 최선을 다해 하루하루를 만들어가려 한다.
# 심사평
- 엄마이자 동시에 직장인이 필요한 순간 우리는 누구나 일을 그만두거나 분신술을 꿈꾼다. 워킹맘의 고민과 고군분투가 잘 그려졌다.
- 일하는 엄마라는 제재를 본인의 자녀에 대한 감정으로만 진행시키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자녀로 느낀 감정까지 포함하여 이야기가 풍부해지는 효과까지 거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