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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진 명절 풍경

최수빈

등록일 2022년10월05일 09시04분 트위터로 보내기 네이버 밴드 공유

자식들에게 폐가 되기 싫어서 죽을 때까지 혼자 살겠다고 호언장담하셨던 할머니. 그랬던 할머니가 추석을 한 달 앞두고 아빠를 호출하셨다. 나 좀 데려가라, 기력 없어서 밥도 못 해먹겄다. 아빠는 곧장 할머니를 우리 집으로 모셔왔다. 할머니가 우리 집에 계시게 되면서 명절의 모습이 전과는 확실히 달라졌다. 난생 처음 겪어 보는 고요하고 한산한 추석이었다.

 

명절 풍경이 달라진 건 우리 집만이 아니었다. 명절 다음 날 추석을 쇠러 내려온 A와 만났다. 4년째 경기도에서 경찰로 일하고 있는 친구였다. 일 년 만에 만난 친구의 얼굴은 방금 득도한 사람처럼 환한 빛이 감돌았다. 그 얼굴이 참 인상적이라 인사를 건네기 전에 이 말을 먼저 할 수밖에 없었다.

 

“너 얼굴이 왜 이렇게 좋아졌어? 뭔 일이 있었던 거야?”

 

A는 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자신이 마침내 해방되었다고 말이다. 해방이라니. 해방을 외치던 그 드라마 끝난 지가 언젠데. 아직까지 해방에 대해 말하는 건 드라마에 너무 과몰입한 거 아니니. 친구는 내 비아냥에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한 번 힘주어 해방과 자유를 외쳤다.

 

“경찰 일이 그렇게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된다더라. 뭘 하든 월에 이백은 못 벌겠냐면서. 나 이제 진짜 자유야.”

 


△ 출처 = jtbc

 

A의 집은 대대로 경찰 집안이었다. 딱히 할 거 없으면 경찰이나 하라는 집안 분위기를 따라 A도 경찰이 됐다. 하지만 A는 경찰 일이 하면 할수록 적성에 안 맞는다고 했다. 당장 일을 때려치고 싶지만 그러지 못했던 건 부모님의 끈질긴 설득 때문이었다. 흙과 가까운 낯빛으로 경찰을 그만 두고 싶다고 하소연하면, A의 부모님은 선물을 사주며 친구를 회유했다. 그만 두겠다는 자와 절대 그만두지 말라는 자의 실랑이는 무려 4년째 이어져왔다.

 

몇 년간 팽팽하게 맞서 싸워 온 상대가 갑자기 변심하면서 실랑이는 허무하게 끝나버렸다. A의 부모님은 더 이상 경찰 공무원을 좋은 직장으로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어디 친구의 부모님 뿐이랴. 노량진 거리의 과밀한 인구와 지붕킥을 거듭하는 공무원 시험 경쟁률에 대한 이야기들은 몇 달 사이에 세상에서 자취를 감췄다. 그 빈 자리를 박봉과 과로를 강요당하는 공무원에 관한 이야기가 차지했다.

 

꿈꾸는 듯한 얼굴로 그만 두면 무엇을 할지 고민하는 A와 헤어지고 가는 길이었다. 문득 대학 대신에 공직 사회에 입문한 B의 소식이 궁금해졌다. A는 공무원 때려치울 생각에 저렇게 행복해하는데, 곧 8년차 공무원이 되는 B는 잘 지내고 있는 걸까. 추석 인사도 하고 안부도 물을 겸 B에게 전화를 걸었다. 명절 쇠러 서울서 내려왔냐고 묻자, B는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어렵게 입을 뗐다.

 

“있잖아, 내가 말 못한 게 있는데…. 나 올해 초에 일 그만 두고 공부 시작했어. 8월에 리트 시험 봤는데, 시험 끝나고도 할 게 많아서 이번 명절엔 못 내려갔어.”

 

B의 고백은 A의 해방 선언보다 놀라웠다. B는 내가 진로 문제로 고민할 때마다 이렇게 말하곤 했다.

 

“후회 없을 때까지 도전해봐. 실패하면 9급 시험 봐서 공무원 하면 돼. 수당까지 합치면 월급도 꽤 되고, 일도 할 만해.”

 

주변에 공무원하는 친구 중에 B만큼 일에 대한 만족도가 높은 사람은 없었다. 그랬던 B마저 공무원을 그만 두겠다니 놀랄 수밖에. B에게 조심스럽게 이유를 물었다. B는 안정적인 삶을 추구하고 싶어서 공무원이 된 건데, 연차가 쌓일수록 불안이 커졌다고 말했다. 인사 적체, 줄어드는 연금,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는 조직. 이런 것들을 지켜보며 공무원으로 사는 게 과연 안전한 선택이 맞는지 의심스러웠다고 했다.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전문직 자격증은 있어야 안정감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는 거였다.

 

사연은 다르지만 같은 결론에 도달한 A와 B를 보면서 영원한 것은 없다는 옛말이 간만에 떠올랐다. 고작 일 년 만에 너무 많은 것이 달라졌다. 앞으로는 모든 것이 점점 더 빠르게 변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이런 시국에 세상의 흐름을 쫓으며 산다는 건 후회를 피할 수 없는 선택이 아닐까. 어느 장단에 맞춰 춤을 춰야 할지 모를 때는 나만 아는 박자에 막춤을 추며 시간을 보내는 방법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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