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천안에서만 살았다. 천안에서 보낸 12년간의 학창 시절을 돌이켜 보면, 그 시절에 내가 했던 모든 행동들은 한 가지 목표로 수렴되었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인서울 대학에 합격하고,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천안을 떠나는 것. 그건 나의 목표이자, 천안에 사는 거의 모든 학생의 목표이기도 했다.
천안의 고등학생들은 모든 인간이 그렇듯이 성격도, 모습도 전부 제각각이다. 하지만 마음속에 품고 있는 목표만큼은 한결같다. 다들 천안을 떠나 서울로 가는 것을 목표로 공부한다.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공부에 관심 없던 아이들도 고등학생이 되면 돌변하더니 공부에 매진한다. 입시에 성공해서 서울행 티켓을 따내면 천안을 떠나 환상과 낭만으로 가득한 미지의 도시로 갈 수 있다는 기대감이 모두에게 동기를 부여한다.
△ 출처 = 이미지투데이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에도 계속 천안에서 사는 것. 그건 고등학생이었던 나에게는 인생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실패의 낙인을 찍는 것과 같은 일로 보였다. 반면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간다는 것은 성공한 인생에 한 발짝 가까워지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평생을 지방에서만 살았던 청소년에게 서울은 대한민국의 수도처럼 객관적인 태도로 대할 수 없는 도시였다. 내게 서울은 가기만 하면 행복이 보장되는 마법의 도시였다. 그런 이유에서 나는 서울행이 확정된 순간 앞으로 무척 행복한 인생을 살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같은 이유에서 서울에서 살고 있는데도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현실을 용납할 수 없었다. 서울의 현실을 끝내 받아들이지 못하고 다시 천안으로 내려왔을 때, 나는 또 한 번 같은 이유에서 내 인생이 실패에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다.
서울에서 행복하지 않았던 이유는 대부분 사소한 것들이었다. 서울에서는 내가 천안에서 살 때는 당연한 줄 알았던 것들이 당연하지 않았다. 김칫국물이 튀지 않은 새하얀 이불, 음식 냄새 대신에 빨래가 잘 마른 냄새만 나는 옷들, 화장실 앞이나 신발장 앞이 아닌 식탁 위에서 먹는 밥, 각양각색의 벌레와 눈맞춤 할 일이 없는 청결한 공간 같은 것들. 당연한 것들이 당연하지 않은 건 서울의 한계가 아니라 내 지갑의 한계였다.
내가 당연하다고 믿는 것들이 서울에서도 당연해지려면 최소한 분리형 원룸에서 살 수 있어야 했다. 그러기엔 내 마음이 부엌과 거실을 가르는 초라한 미닫이문이 하나 있다고 해서 월세가 십만 원이나 오르는 걸 충분히 이해할 만큼 넓지 못했다. 게다가 내 초봉으로는 원룸의 월세를 감당하는 것조차 벅찼다. 원룸 전세가 1억이나 하는 서울에서는 언제 나의 생활의 질이 개선될지 막막하기만 했다. 결국 나는 막막함을 견디지 못하고 당장 당연한 권리를 누리기 위해 무작정 천안으로 돌아왔다.
다시 시작된 천안에서의 삶은 안락했다. 자식 셋이 서울로, 군대로 떠나버린 부모님 집에는 빈방이 두 개나 있었다. 방 하나에는 침대와 옷을 들여놓고, 다른 방에는 책상과 책들을 넣었다. 이불이나 옷 걱정 없이 넓은 주방에서 먹고 싶었던 음식들을 마음껏 만들었다. 만든 음식은 예쁜 그릇에 담아 식탁 위에 놓고 먹었다. 빨래를 따사로운 햇볕 아래에서 말릴 수 있게 되었다. 햇볕을 충분히 쬔 이불과 옷에서는 싱그러운 향이 났다. 서울에 가면 모든 게 잘 될 거라는 믿음을 한 번도 의심해본 적 없던 내가 한심했다. 이상적인 삶이 발밑에 있었는데 나는 그걸 왜 먼 곳에서만 찾으려고 했던 걸까.
내가 과거에 철없이 서울 타령을 했던 게 아니라는 걸 구인 사이트를 확인해보고 나서야 알았다. 천안은 일단 일자리 수 자체가 턱없이 적었고, 그마저도 고용 안정과 연봉 차원에서 괜찮다고 말할 수 있는 일자리가 아니었다. 천안에서의 생활이 아주 만족스러운데도 이곳엔 할 만한 일이 없어서 다시 상경할 수밖에 없었다.
요즘엔 천안에서 만난 친구들을 서울에서 만난다. 대부분의 친구들이 나처럼 대학과 직장 때문에 서울에 있어서다. 우리는 만나면 천안에서 지낼 때가 좋았다는 말을 항상 빼먹지 않는다. 고되고 팍팍한 서울살이에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나날이 커진다. 하지만 우리가 고향에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은 잠깐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