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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들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동철 한국노총 부천노동상담소 상담부장(leeseyha@naver.com)

등록일 2022년06월02일 09시46분 트위터로 보내기 네이버 밴드 공유

“너의 젊음이 너의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이,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 박범신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은교>에 나오는 주인공의 대사다. 우리 사회의 맹목적인 젊음에 대한 찬양, 나이 듦을 죄악시하는 풍토에 비춰 보면 큰 울림을 주는 말이다. 그러나 노동현장에서 나이가 들었다는 것은 여전히 죄다. 이러한 인식이 반영된 대표적인 제도가 임금피크제다.

2013년 고용상 연령차별금지 및 고령자고용촉진에 관한 법률(고령자고용법)이 개정돼 정년이 기존 55세에서 60세로 늘었다. 선진국에서라면 난리가 날 일이다. 정부가 사회보장의 부담을 덜기 위해 연금 수급연령을 높이고 정년연장을 시도했던 프랑스에서는 은퇴 이후 연금으로 편안한 노후생활을 기대한 노동자들이 “일을 더 하라는 것이냐”며 총파업을 했다.

 



그러나 한국 노동자들은 스스로의 노동으로 그나마 노후파산을 막게 됐다며 안도했다. 국민연금 재정위기로 연금 수급시점이 늦춰지고 소득대체율이 재직 중 임금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상황에서 정년연장은 불가피한 결정이었다. 고령화에 따른 기업의 인력부족 문제를 해결하고 사회복지 부담을 덜기 위한 정부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다. 그런데 기업으로서는 인건비 부담이 늘었다. 이러한 비용 부담을 단기간에 해소하기 위해 기업과 정부가 선택한 방법은 노동자 임금삭감이었다.

임금피크제의 주요 형태는 회사가 노동자의 정년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임금을 정년 전까지 일정기간 삭감하는 이른바 정년보장형 ‘임금피크제’다. 정년 60세 법제화 이후 공기업을 비롯해 금융권 등 대부분 민간기업에서 시행되고 있다.

사회정책적 필요에 의해 법으로 정년을 늘려 놓고 ‘임금피크제’라는 이름으로 임금을 감액하는 조삼모사 같은 정책에 노동자들의 불만이 거세졌다.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정부와 기업은 노동생산성 논리를 내세웠다. 나이가 듦에 따라 생산성이 줄어든다며, 연공급제로 근속에 따라 임금이 인상되는데 정년연장으로 기업 부담이 늘어나기 때문에 임금을 줄여야 한다는 논리였다. 여기에 청년 신규채용을 명분으로 더했다. 장기근속자의 임금을 줄여 기업이 청년들의 신규채용을 늘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좀 더 쉬운 직무로 변경되거나 근로시간이 줄어드는 것도 아닌데 임금피크제 시행 이후 55세부터 회사는 임금피크제를 내세워 임금을 감액했다. 그냥 나이 들었다고 임금을 깎는 것이다. 임금상승 폭이 작아 연공급제라는 이름이 무색한 100명 미만 사업장에서 정년보장형 임금피크제는 이처럼 임금삭감과 구조조정의 수단으로 악용되고 있었다. 그렇게 깎은 임금으로 청년일자리를 늘렸을까? 신규채용은커녕 현장에서는 여전히 장기근속자의 초과근로로 생산량을 커버한다.

정부가 ‘철밥통론’을 내세우며 노동자의 팔을 비틀어 임금피크제를 시행한 공공부문도 다르지 않았다. 2016~2018년 산업은행은 임금피크제 감액분을 활용해 19명을 신규채용하고 이듬해 7명, 그리고 2018년에는 3명을 채용하는 데 그쳤다. 기술보증기금과 신용보증기금은 2017년에 7명을 신규채용하고, 2018년에는 한 명도 채용하지 않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고령화 시대 도전 과제’(Ageing: Debate the Issues)라는 보고서에서 “고령자 일자리가 더 적어질수록 청년들 일자리가 더 많아진다는 주장”은 편견이라고 평가했다. “일하는 능력이 나이에 따라 순차적으로 악화된다는 주장은 자신들의 연구에서 지지되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이와 같은 ‘편견’이 “고용기회를 감소시킬 뿐만 아니라, 개혁 노력을 훼손시키고 고령자 친화적 고용관행 조성을 저해했다”고 지적했다.

임금피크제가 청년 신규채용은커녕 기존 노동자의 사기를 악화시켜 고령자 고용에 악영향만 끼쳤다는 비판도 나왔다. 이병희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원은 ‘중고령자 계속고용 촉진 필요성 지원방안’이라는 제목의 연구에서 임금피크제가 고령자 고용에 오히려 마이너스 효과가 있었다고 분석했다. “직무나 임금체계, 근무형태의 변화 없이 임금의 감액 등에 의존할 경우 근로자의 사기에 악영향을 줘 생산성이 높은 노동자의 조기 퇴직을 유발하는 역효과를 나타낼 것”이라는 우려였다.

지난달 26일 대법원 1부는 한국전자기술연구원에서 일했던 노동자가 제기한 임금피크제 무효 소송에서 노동자의 손을 들어줬다. 해당 사건에서 회사는 인건비 부담을 완화하고 실적 달성률을 높이기 위한 목적으로 노조와 합의를 통해 정년을 61세로 정하고 55세부터 임금을 삭감하기로 합의했다. 이에 따라 원고 노동자는 월 93만원에서 많게는 280여만원가량을 감액당했다. 51~54세 노동자에 비해 업무 실적이 더 높았음에도 말이다.

대법원은 임금피크제 시행 전후로 원고 노동자에게 부여된 목표 수준이나 업무 내용에 차이가 없고, 임금피크제로 불이익을 입는 노동자에 대한 대상조치(업무량 감소 등)도 없었다는 점을 들어 정당성을 부정했다. 회사의 임금피크제가 제공하는 근로의 질이나 양과는 무관하게 오로지 ‘일정 연령에 도달했는지 여부’에 따라 임금을 삭감하고 있어서 연령에 따라 임금을 차별하지 마라고 정한 고령자고용법 위반으로 무효라고 판결했다.

만시지탄이지만 이번 대법원 판결은 정년보장형 임금피크제의 위법성을 확인한 것에 큰 의의가 있다. 이를 계기로 사회정책적 필요에 의해 도입된 정년연장 부담을 노동자에게 떠넘기는 정년보장형 임금피크제는 시급히 폐지돼야 할 것이다.

출처 : 매일노동뉴스(http://www.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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