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리병원 도입 논의는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7년 IMF 금융위기 직후 집권한 김대중 정부는 2002년 ‘경제자유구역의 지정 및 운영에 관한 법률’(경제자유구역법)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2006년 노무현 정부는 ‘제주특별자치도 설치 및 국제자유도시 조성을 위한 특별법’(제주특별법)을 제정했다. 두 법안 모두 규제를 완화해 외국인 투자를 유치하고, 경제를 성장시켜 국토의 균형 발전을 도모하기 위한다는 명분이었다. 20년이 지난 지금 이렇게 됐다는 증거는 없다.
영리병원 논란의 시작
최초의 영리병원은 경제자유구역으로 지정된 인천 송도에서 추진됐다. 그러다 본격적으로 논란을 일으키게 된 것은 2013년 제주도가 중국 의료기업의 영리병원인 싼얼병원 설립을 복지부에 요청하면서다. 당시에 싼얼병원은 복지부가 제대로 된 조사도 없이 덜컥 승인했다가 싼얼병원의 모기업에 해당하는 기업이 사기범죄자가 운영하는 실체 없는 기업이란 사실이 드러나 이듬해 9월 15일 최종 설립을 불허했다. 진주의료원 폐원, 영리자회사 추진 등 의료민영화를 본격 추진하던 박근혜 정부로서는 한방 먹은 것이었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멈추지 않고 2015년 4월 2일 ‘녹지국제병원’(녹지병원)설립을 추진했다. 그러나 당시 의료민영화(영리병원)저지범국민운동본부는 녹지병원이 국내에서 가장 규모가 큰 성형병원인 ‘BK성형외과’와 중국 부동산 기업의 영리병원 설립 꼼수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국내 병원 자본이 의료사업 경험이 전무한 녹지그룹과 손잡고 우회적으로 국내에 1호 영리병원을 설립하려 한 것이다. 피부, 성형 중심의 48병상 규모 등 싼얼병원의 판박이로, 싼얼병원이 실패하자 녹지병원으로 재추진하는 것이라는 의심은 당연했다.
녹지병원에 대한 국내병원 우회투자 의혹을 제기하고 국민들의 반대 여론이 확산되자, 녹지그룹은 5월 19일 사업계획 제출을 자진 철회했다. 그러나 녹지그룹은 6월 11일 법인명만 바꿔서 다시 영리병원 사업계획서를 제출했다. 당시 메르스 사태가 한창이었던지라 원희룡 지사와 박근혜 정부는 이를 비밀에 부쳤다. 그러다 12월 18일, 시민사회단체가 제기한 국내자본의 우회투자, 의료사업 경험 전무 등의 문제점들이 여전히 해소되지 않은 상황에도 불구하고, 복지부는 제주영리병원을 승인했다. 심지어 박근혜와 원희룡은 ‘영업비밀’을 이유로 사업계획서조차 공개하지 않을 정도로 빈민주적이었다.
그러나 원희룡과 박근혜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박근혜의 국정농단이 폭로되면서 강력한 퇴진 촛불로 탄핵되고, 2017년 5월 조기 대선으로 문재인 정부가 들어섰다. 원희룡은 눈치를 보며 영리병원 추진을 일단 멈췄다. 대선 직후 5월 18일 제주도는 “제주영리병원 정책폐기 공공의료 강화…제주영리병원 정책폐기는 새정부 정책방향에 맞추어 검토해 나가고… 공공의료를 강화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원희룡의 기회주의적 면모를 볼 수 있는 장면이었다.
그러나 원희룡은 이내 본색을 드러내며 영리병원을 재추진했다. 숙의형 공론조사라는 민주적 절차까지 거치며 “도민의 뜻을 최대한 존중하고 따르겠다”며 말이다. 그러나 원희룡의 바람과 달리 공론조사 결과는 58.9%의 압도적 녹지병원 반대로 나왔다. 공론조사 중 원희룡의 비민주적 행태에도 제주도민은 두 달여에 걸친 토론 끝에 58.9% 압도적 반대 의지를 보여준 것이다.
분노스럽게도 원희룡은 도민들과의 약속을 깨며 공론조사를 무시하고 2018년 12월 5일 녹지병원을 조건부 허가했다. 영리병원 반대 운동 진영은 강력하게 대응했다. 그리고 문재인 정부 1년여 동안 개혁 배신에 실망한 노동자들의 투쟁이 이어졌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원희룡은 결국 2019년 4월 17일 다시 허가를 취소해야 했다. 당시 ‘제주영리병원 철회 및 의료민영화 저지 범국민운동본부’(영리병원저지범국본)은 이렇게 말했다. “16년 동안 영리병원 설립에 맞서 싸운 제주도민의 승리이자 지난해 말 시작된 영리병원 저지 운동의 승리다...영리병원저지범국본이 재출범해 제주영리병원 허가를 철회시키기 위해 투쟁해 왔다. 제주도민운동본부는 거의 매주 촛불 집회를 열었고, 영리병원저지범국본도 10만이 넘는 전국적인 영리병원 저지 서명운동과 기자회견, 토론회, 제주도 원정 집회 등...”
시대착오적 법원
예상대로 녹지병원은 두 가지 소송으로 반격했다. ‘개설 허가 취소 처분 취소 소송’과 ‘조건부 허가 위법 소송’이었다. 전자는 대법원까지 갔지만 녹지병원이 승소했다. 후자 역시 1심 판결이 난 현재 녹지병원이 승소했다. 제주도는 항소했는데 이 소송에서도 패소하면 제주도는 녹지그룹에 거액의 손해배상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대법원과 법원 판결은 명백히 공공의 이익에 위배되고 시대에 뒤처진 것으로 국민들의 신뢰 상실을 자초했다. 애초에 녹지병원이 의료사업 경험이 전무해 영리병원 설립 요건을 규정한 조례를 충족하지 못했고, 자신들 스스로 사업계획서에 외국인 관광객을 상대로 사업할 것이라 명시했다는 점을 법원은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법원이 가장 깊이 고려했어야 할 사실은 소송 진행 와중에 코로나19 팬데믹이라는 미증유의 역사적 의료 재난사태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코로나19는 공공의료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강력히 일깨워 주었고, 전체 의료의 90%를 차지하는 민간병원들은 감염병 재난에서 10%의 공공병원만큼의 역할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2015년 메르스 사태에 이어 두 번째로 말이다.
법은 변화한 현실을 뒤늦게야 따르는 보수적 체계다(변화를 반영하지 않기 일쑤지만). 법이 현실을 규정하는 게 아니라 거꾸로다. 예컨대, 지금의 헌법은 1987년의 민주주의 대항쟁의 결과다. 그리고 노동자들의 대파업과 대대적 민주노동조합 설립으로 노동관계법도 개정된 것이다.
따라서 대법원과 법원의 판결을 인정할 수 없고 인정해서도 안 된다. 이를 인정한다면 다음 신종 감염병 재난사태에 대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영리병원은 가뜩이나 빈약한 공공의료를 빈사상태로 몰고 갈 것이다. 또한 코로나19에서 큰 역할을 한 건강보험을 파괴하게 될 것이다.
영리병원을 허용하는 경제자유구역법과 제주특별법같은 시대착오적 법들은 폐기돼야 한다. 기업 영리 활동을 위한 규제완화가 목적인 이 법들은 실패한 신자유주의 도그마에 기반해 만들어진 법이다. 신자유주의는 경제를 성장시키고 삶을 개선하기는커녕 2008년 금융공황의 원인이 됐고, 세계경제는 아직도 이 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코로나19는 다시 위기에 직면한 세계경제를 급속도로 궁지에 몰아 넣었다.
영리병원 반대 운동
한국노총이 함께 하는 무상의료운동본부와 의료민영화(영리병원)저지범국민운동본부 등은 영리병원 저지 운동을 벌여 왔다. 싼얼병원과 녹지병원의 실체를 폭로하고 영리병원이 허용될 경우, 영리병원의 전국적 확산은 시간 문제이며, 건강보험을 무너뜨릴 것이라는 점을 알려왔다. 따라서 언제나 영리병원에 대한 반대 여론은 압도적이었다. 특히 영리병원 설립이 코앞까지 닥쳐온 제주도민들의 반대는 강력했다.
지속적인 영리병원 반대 운동이 없었다면 이미 영리병원이 전국을 뒤덮고 있을지도 모른다. 코로나19 피해는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이 처참했을 것이다. 영리병원은 단 한 개도 허용해서는 안 된다. 영리병원 망령을 제압하고 공공의료를 강화하기 위한 투쟁에 모두 나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