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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니트(NEET)족의 탄생기

최수빈

등록일 2022년03월31일 14시16분 트위터로 보내기 네이버 밴드 공유

자기소개서를 쓰면서 자괴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싶지마는 내가 느끼는 자괴감은 유독 심했다. 아무리 고쳐도 내 자소서는 진부했고, 온갖 거짓과 허황으로 범벅되어 있는 듯했다. 내 자소서는 인사팀에서 첫 문장만 읽고 쓰레기통으로 던져버릴 운명을 타고난 것처럼 보였다.

 

내 자소서가 뻔해져 버린 이유는 글에 나만의 경험이나 생각이 들어가 있지 않아서였다. 나만의 것을 써넣고 싶었지만 그런 게 나한테 있나 싶었다. 대입을 준비하며 자기소개서를 썼을 때도 그랬다. 고등학교를 한참 전에 졸업했는데도 나의 수준은 여전히 그때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에 자괴감은 두 배가 되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자기소개서를 쓰는 게 너무 괴로워서 매일 밤 엄마를 붙잡고 울었다. 밤을 꼬박 새워서 자소서를 완성해가면, 선생님은 듣기 좋은 이야기가 아니라 진솔한 나만의 이야기를 써오라며 퇴짜를 놓으셨다. 선생님의 조언을 납득할 수 없어서 괴로워했던 건 아니었다. 내 글이 별로라는 건 선생님의 조언 없이도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나를 정말 괴롭게 만든 건 여태까지 쓴 글을 전부 갈아엎은 후에 채워 넣을 나만의 이야기가 없다는 데 있었다. 내가 언론정보학과를 가고자 하는 데에는 특별한 계기나 이유가 없었다. 경영학과와 법학과는 내 성적으로는 버겁고, 언론정보학과 정도면 합격 가능성이 없지 않은 데다가 남들 보기에 적당히 멋있어 보일 듯해서 가려고 했다.

 

대학을 결정할 때뿐만 아니라 인생에서 중요한 선택을 내릴 때 나는 줄곧 이런 식으로 결정을 내렸었다.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래야만 할 것 같아서 내린 선택들이 내 인생을 좌우했다. 오랫동안 내 삶의 중심은 나 자신이 아니라 타인의 시선과 의견에 있었다.

 


△ 출처 = 이미지투데이

 

결국 나는 나만의 이야기로 가득 찬 자기소개서를 쓰는 데 실패했다.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진부하고 온갖 클리셰로 범벅된 자기소개서를 제출했다. 나만의 이야기는 지난한 과정과 시간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그건 수능을 코앞에 둔 내가 해낼 수 없는 일처럼 보였다. 대학에 붙고 한가해지면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가는 시간을 갖자고 생각했다.

 

막상 대학에 가서도 나를 찾는 일에 시간을 많이 할애하지 못했다. 취업이 나날이 어려워지고 있는 상황에서 취업 준비보다 중요한 일은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의 취향이나 적성을 알아가는 일은 당장 하지 않아도 큰 문제가 없는 부차적인 일로 보였다. 학점관리부터 영어, 대외 활동, 인턴십에 이르기까지 남들이 취업을 위해 하는 것들을 별 고민 없이 쫓아서 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대학에서의 4년이 끝나 가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변함없이 천편일률적인 자기소개서를 찍어 내는 중이었다.

 

나는 정말 이대로 괜찮은 걸까? 닥치는 대로 매일 자소서를 써내면서 이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이대로 직장인이 되어버린다면 평생 내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고 살게 될 것 같았다. 직장에서 주어진 일들을 착실히 하다 보면 또 한 번 시간이 훅 지나가 있지 않겠는가. 그런 걱정을 하고 있을 때, 전에 인턴십을 했던 회사에서 정규직 채용을 제안해왔다.

 

일주일 동안 고심한 끝에 취업하는 대신에 일 년간 나를 위한 시간을 가져보기로 했다. 이유는 직감적으로 지금이 아니면 그럴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의무적으로 해야 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환경 속에 나를 당분간이라도 풀어 놓고서 내가 어떻게 행동하는지 지켜보고 싶었다. 부모님을 설득하기가 쉽지 않을 거로 생각했는데 두 분은 순순히 내 뜻을 따라주셨다. 그렇게 나는 일 년 동안 집안의 공인을 받은 니트족으로 살게 되었다.

 

일 년간 니트족으로 살면서 바빠서 읽지 못했던 책들을 실컷 읽고, 훌쩍 떠나도 보고, 배우고 싶었던 것들도 배웠다. 물론 실컷 자기도 했고, 온종일 아이패드만 보는 날도 있었다. 그 자유로운 시간 속에서 나에게 누구도 하라고 하지 않는데 순수하게 좋아해서 해보고 싶은 일이 생겼다. 니트족 생활을 통해서 꿈을 찾았던 나로서는 니트족이 마냥 게으르고 나약한 청년의 모습으로 그려지는 것이 아쉽다. 내가 경험한 니트족은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기 위해서 잠시 멈춘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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