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자룡 한국노총 조직확대본부 국장
반파시즘 ․ 반자본주의 투쟁
사회주의를 더 잘 실현(?)하기 위해 고안되었다고 하는 파시즘은 그 세력의 확장을 저지하고자 하는 사회주의를 비롯한 반파시즘 세력과의 대결에 직면한다. 이탈리아 공산당 당수이자 반파시즘을 주창한 그람시(Antonio Gramsci, 1891~1937)는 1926년,「리옹테제」를 통해 노동계급이 반파시즘과 반자본주의 투쟁을 극대화해야 한다는 관점과 노동계급 조직을 통해 나아가야 할 이탈리아 공산당의 반파시즘 투쟁노선을 제시했다. 그람시는 이탈리아 공산당은 곧 혁명적 정당이 되어야 하며 노동계급의 총파업으로 파시즘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이끌어야 한다고 밝혔다. 공산당은 전 노동계급을 대중적으로 조직화한 총파업 투쟁 승리를 통해 사회의 다양한 영향력에 대한 주도권(hegemony)을 쥘 수 있으며, 이와 같은 반파시즘·반자본주의 투쟁을 위한 대중정당으로서의 능력을 극대화할 것을 주문했다.1)
<그람시>
이것은 특히 왕정 반대를 선동하면서 성취돼야 하는 것이다. 왕정은 파시스트 정권을 떠받치는 대들보의 하나로, 이탈리아 파시즘의 국가 형태다. 공산당은 이탈리아 대중을 왕정 반대 행동에 동원하는 것을 주요 과제로 삼아야 한다. …… 그러나 이와 함께, 파시즘 정권의 나머지 대들보인 산업·금권정치 집단과 지주에 대항하는 선동과 투쟁을 언제나 동시에 벌여야 한다. 공산당은 왕정 반대 선동에서 언제나 국가의 형태 문제를 제기하면서, 공산당이 국가에 부여하고자 하는 계급적 내용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를 국가 형태 문제와 긴밀하게 결부시킬 것이다. …… “노동자·농민 위원회를 기반으로 한 공화정 의회, 산업에 대한 노동자 통제, 농민들에게 토지를.”2)
이와 같은 파시즘에 대항한 노동자 계급의 투쟁은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독일, 일본, 헝가리 등의 파시스트 블록 국가, 그리고 반파시즘 연합국가인 영국, 미국, 캐나다 등으로 더욱 확대되기에 이른다. 반파시즘 투쟁은 국가별로 다양한 양상을 띠고 있지만, 투쟁의 핵심 주동 세력 및 지도그룹이 공통으로 노동자 계급과 노동조합이었다는 점이다. 반파시즘 투쟁을 정교하게 조직하고 혁명적으로 이끌 수 있는 단위는 노동자 계급이 유일하였으며, 이들은 ‘반파시스트 저항운동의 중핵’을 이루면서 반자본주의 ․ 반파시즘 투쟁이라는 하나의 괘를 형성하여 파시즘과 자본에 저항했다(김금수 2014, 559).
또한 반파시즘이라는 단일전선을 형성하기 위해 노동운동 세력이 단일대오로 집결하는 추세를 보여주기도 했다. 독일의 경우 공산당원과 사회민주당원이 함께 행동위원회를 건설하여 투쟁하였으며, 이탈리아의 경우 ‘북이탈리아민족해방위원회’ 등을 결성하여 공산당, 사회당을 비롯하여 쁘띠 브루주아지및 양심적 기독교 세력까지를 포괄하는 투쟁을 전개했다. 이러한 투쟁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중립을 선언했지만 친파시즘적인 경향을 보인 스웨덴, 스위스, 아일랜드 등의 중립국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어, 이들 중립국에서도 파시즘과 자본에 대항한 파업투쟁과 정당운동을 발생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결국, 파시즘은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몰락하고 그 단어마저도 소위 멸칭(蔑稱)으로 전락한다.
노동계급의 과제
파시즘이 사회주의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사실은 파시즘 태동 시점에 이탈리아와 독일 프롤레타리아트가 가졌던 파시즘에 대한 기초적인 시각과 무관하지 않다. 파시즘이 시작될 시점에 대다수의 사회주의자는 정치․경제적 이해관계에 따라 프롤레타리아트가 사회주의를 선택할 것으로 판단했다. 사실 국가 내부에서만 사유한다는 측면을 제외하고는 파시즘과 사회주의는 유사한 층위에 있어 보임 직한 것이 사실이다. 게다가 국가 외부의 사유가 철저히 국가권력 일방에 점유되어 있었던 왕정과 그 권력을 계승하는 공화정의 시대에서, 국가사회주의를 앞세워 개인의 이익을 국가의 이익과 일치시키는 파시즘은 어쩌면 미시적 관점에서 더욱 확실한 선택지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프롤레타리아트는 파시(나치)즘을 선택했다.
우리는 이러한 선택을 역사적으로 종종 목격하곤 한다. 마르크스(Karl Marx, 1818~83)가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헤겔은 어디선가 세계사에서 막대한 중요성을 지닌 모든 사건과 인물들은 반복된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이는 것을 잊었다. 한 번은 비극으로 다음은 소극(farce)으로 끝난다는 사실 말이다.’라고 말했듯, 프랑스 민중들은 전제군주 나폴레옹 1세의 아들인 나폴레옹 3세를 투표로 선택했다. 또한 가까이 박정희 독재정권의 연장선인 박근혜 정부를 민주적으로 선택한 우리나라 국민의 사례도 있다. 이러한 역사적인 대중의 선택은 기존의 이데올로기적 관점과 문법으로는 해석이 어렵다. 왜 대중은 파시즘을 선택하는가. 어찌하여 노동계급은 노동자 계급정당을 선택하지 않는가.
푸코(Michel Foucault, 1926~84)는 이러한 파시즘과의 싸움을 욕망의 관점으로 확대한 들뢰즈와 가타리의「안티 오이디푸스」(Anti-Oedipus) 서문을 통해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 파시즘과의 투쟁을 이데올로기 간의 전장에서 파시즘이라는 욕망 자체에 대항하는 문제로 해석하며, “모든 일원적이고 총체화하는 편집증에서 정치적 행동을 해방하라”고 밝히고 있다. 대중을 포섭하는 것은 그들을 집단화한 경직된 시선이 아니라 대중의 욕망이라는 점은 현시기 노동계급의 투쟁에 많은 시사점을 남길 수 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통한 가족주의, 가족이데올로기가 20세기 파시즘 국가의 초월적 기재로 작동하였다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문제의식은 21세기 파시즘의 새로운 양상, 노동계급을 옥죄어 오고 있지만 더욱 미시적이고 더욱 베일에 가려져서 제대로 볼 수 없는 어떠한 형태에 대한 사전 경고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미주>
1) 하지만 그람시와 공산당의 바람과는 달리 1920년대 이탈리아 프롤레타리아트의 선택은 이탈리아 국가 파시스트당이었다. 무솔리니는 1922년 이탈리아의 총리로 임명되고 국가 파시스트당은 이탈리아 유일의 합법 정당이 된다. 이후로 국가 파시스트당은 1943년까지 이탈리아 왕국의 집권당으로서 맹위를 떨쳤으며, 비슷한 나치즘 계열의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소위 나치당) 역시 1945년까지 전체주의를 내세워 독일을 통치한다.
2) ‘혁명적 정당 건설을 위해 목숨까지 바친 레닌주의자’, 노동자연대 354호 일부 수정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