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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한국노총 난생처음 노동문화제 : 독후감부문 특별상 수상작

등록일 2021년04월05일 16시05분 트위터로 보내기 네이버 밴드 공유

“전태일 평전(조영래, 아름다운전태일)을 읽고”   김시온(특별상 청소년 부문 수상)

 


 

이번 전태일 50주기는 3일 동안 국제포럼이 개최될 만큼 국민들의 관심과 참여도가 높았다. 마침 정치와 법 수업 시간에 노동에 대해 배웠는데 언론에 보도된 전태일 50주기 기사들을 접하게 되었다. 그건 나에게 그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하게 된 동기가 되었다. 그래서 전태일 열사 50주기가 갖는 특별한 의미를 되새겨 보기위해 나는 2020년 새로 개정된 ‘전태일 평전’을 구입하여 읽게 되었다. 책을 읽는 내내 낯설고 충격적인 내용에 놀랐다. 전태일 50주기가 갖는 의미는 천안함이나 세월호 사건과 같이 사람들이 잊지 말아야할 사건이라 생각된다.

 

전태일은 1948년 9월 28일 대구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 아버지의 폭력과 폭언에 시달리며 살았다. 그의 어머니는 가족의 경제적 궁핍을 해결하기 위하여 식모살이를 해야 했다. 이러한 문제들로 인해 전태일의 가족은 일찍부터 함께 살 수 없었다. 동생들과 함께 홀로 남겨진 전태일은 신문팔이, 구두닦이에 이어 재단사에 이르기까지 어린 나이부터 여러 노동 현장에서 성장하였다. 그는 비록 가난했지만 내면에는 강한 신념을 품고 있었다. 특히 배움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고 배움의 길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의 열정은 결국 법대생들이 보는 근로기준법 책을 펼치기에 이르렀다. 전태일은 가난과 질병과 무교육의 굴레 속에 묶인 버림받은 목숨들에게도, 저임금으로 혹사당하고 있는 노동자들에게도, 먼지 구덩이 속에서 햇빛 한 번 못 보고 하루 열여섯 시간 노동해야 하는 어린 여공들에게도,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요구’가 있다는 것을 밝히길 원했다. 모든 인간의 생명은 동일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 그는 같은 뜻을 품은 사람들을 모아 바보회를 조직하였고 근로 조건 개선을 위한 노동운동을 시작했다. 그들은 근로기준법에 명시되어 있는 대로 사람 취급을 해달라고 주장했지만 사회에서는 이들을 주목하지 않았다. 공장장들은 노동운동에 참가한 자들을 해고하고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다른 공장에서도 일하지 못하게 했다. 전태일은 자신의 의지와 뜻을 펼치고 노동자들의 상황을 알리기 위해 근로기준법 책을 손에 들고 불타는 몸으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 라고 외치며 쓰러졌다. 근로기준법의 화형식이 이루어진 것이다.

 

전태일이 친구들에게 남긴 유언이 있다. 유언의 내용은 이러하다: “자네들, 부모에게 효도해야 하네. 뭐니 뭐니 해도 사람이란 부모에게 잘못하면 안 돼. 너희 부모에게 효도하고, 그리고 시간이 남으면 우리 어머니께도 날 대신해서 효도해 주게” 이 부분에서 나는 그의 지극한 효심에 마음이 숙연해졌다. 그의 희생으로 노동운동과 노동법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확대되었음을 생각할 때 나는 그의 희생에 깊은 존경의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전태일처럼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여 사회에 큰 영향을 준 인물 중에는 20세기 초 영국의 에밀리 데이비슨이라는 여성이 있다. 그녀는 영국에서 여성의 참정권 운동을 주도하였다. 당시 여성들에게는 정치참여와 관계하여 법적 권리가 거의 없었다. 그녀는 투표권이 억압과 불평등을 해결 해줄 수 있는 열쇠라고 믿었다. 아홉 번의 수감과 잦은 고문으로 쇠약해진 에밀리는 자신의 죽음만이 답이라고 믿게 되었다. 그녀는 경마장으로 가서 달리는 말에 뛰어들어 여성에게도 투표권을 달라고 외쳤다. 에밀리 데이비슨의 희생은 영국 여성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그리고 그녀가 숨진 지 5년만인 1918년 30세 이상의 영국 여성들은 투표권을 인정받게 되었다. 에밀리 데이비슨과 전태일 그리고 또 다른 전태일들은 사회를 바꾸기 위해 노력하였고 자신의 목숨까지 희생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나는 그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가진다. 그리고 그들의 정신을 이어받고 싶다.

 

전태일이 겪었던 상황은 나로 하여금 윤동주의 시 ‘십자가’를 생각나게 한다. 마치 절망의 광야에 외롭게 핀 꽃과 같은 느낌이 든다. 시의 화자는 조국의 광복과 독립을 희망하였지만 이겨낼 수 없는 현실에 좌절한다. 결국 남은 것은 자신의 무력한 모습 뿐 이지만 ‘십자가가 허락된다면’이라는 시구를 통해 자신을 희생하여서라도 나라의 독립을 이끌고 싶다는 의지를 보인다. 그리고 목을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조용히 흘리겠다고 한다. 시 십자가의 화자와 전태일이 상당히 비슷하다고 본다. 시의 화자는 독립을 희망하고 전태일은 노동자의 권리 존중을 희망한다. 화자가 괴로웠던 사나이지만 이제는 행복하다. 비록 과거는 괴로웠지만 희생으로 얻는 희망의 기쁨이 극명하게 대비 되었고 자신은 목숨을 잃었지만 다른 이들의 행복을 위해 희생을 감수하였다. 십자가 시의 화자가 전태일의 모습으로 오버랩 되었다. 그의 희생정신과 그의 올곧은 신념이 존경스럽다.

 

전태일 평전을 읽고 그가 살던 시대의 노동 현실과 사회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다. 공업이 차지하는 비율이 높아지고 기계가 발달하고 직업이 분화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자본주의의 원리가 확산되었고 대량 생산과 소비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기 시작한 시기이다. 산업화를 통해 얻게 된 이익도 많았지만 그림자에 가려진 각종 사회 불평등과 노동자들의 소외 현상이 다반사로 일어났다. 영화 ‘모던 타임즈’에는 컨베이어 벨트에서 하루 종일 나사못을 조이는 찰리 채플린과 단순 노동자들이 나온다. 이처럼 산업화 시대에는 노동자들이 자신의 고유한 가치를 잊은 채 기계의 부품으로 전락했고 분업화되고 획일화된 사회의 희생자들이 되었다.

 

전태일 같은 ‘바보’가 필요하다. 전태일 재단 이수호 이사장의 말처럼 스스로 사회구조 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전태일 정신’이 요구된다. 전태일은 스스로의 고통을 감내하면서까지 자신의 고통과 어려움뿐만 아니라 주변의 어려움까지 함께 고민하고 해결하려고 했다.

 

50년 전에 대한민국의 상황은 전쟁 이후에 상당히 혼란스럽고 국가가 건설되면서 어려운 상황을 겪고 있었다. 그래서 상당히 힘든 시기를 모든 국민이 지나고 있었다. 숨겨진 전태일이 많았다. 산업화로 인한 인간소외 현상이 심각했다. 전태일은 분신자살을 함으로써 노동자들의 생활을 개선하려고 하였다. 이 시대에도 모양과 형태는 다르지만 비슷한 어려움이 아직도 남아 있다. 이 시대에는 어떤 사람이 전태일 같은 사람이 될 것이고 어떻게 과제들을 어떤 방식으로 극복할 것인지가 관건이다. 이 질문이 전태일 평전을 읽으면서 나에게 주어진 과제이기도 하다.

 

<심사평>

☞ 윤동주 시와의 인용 비유가 신선했다.

☞ 여러 예시를 들어 전태일과 같은 역사적 희생의 숭고함을 강조하고, 평소 전태일과 노동자에 대한 관심을 마지막 결심으로 녹여냈다.

 

 

“열 가지 당부(하종강 외, 창비)를 읽고”   송하겸(특별상 청소년 부문 수상)

 

 

대한민국 국가대표는 ‘노동자’이다.

 

실업계고 교에 재학 중인 학생이고, 현재 자동차 공업 계열 회사 취업을 한 상태인 저는 노동자와 노동조합에 대해 많이 알고,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노동인권을 강조하는 내용에 이끌려 열 가지 당부라는 책을 선택한 것 같습니다.

 

문재인 정부가 새 헌법 안 만들면서 헌법의 ‘근로’라는 용어를 ‘노동’으로 수정한다고 밝혔습니다. 우리나라는 노동자보다는 근로자라는 용어를 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근로’라는 단어는 노동자성을 희석하기 때문에‘근로’보다는‘노동’으로 사용해야 하고, 근로자의 날 또한 노동자의 날로 바뀌어야 합니다. 노동자는 고액연봉 전문직, 대기업 사원, 식당 직원 등 노동력을 제공하고 급여를 받는 사람들 모두가‘노동자’입니다. 이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법이 바로 노동법입니다. 노동법은 많은 사람의 희생과 노력을 바탕으로 발전해 왔고, 시대의 흐름에 따라 노동법은 발전하기도 하며, 후퇴하기도 하였습니다. 17세 재단사 전태일은 우리나라의 노동실태를 알리고, 그가 바친 목숨은 많은 사람이 노동 운동과 노동 문제를 관심 두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노동3권을 비롯한 근로기준법, 산업재해 보상법 등 많은 법이 만들어졌습니다. 법과 제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의 권리가 지켜지지 않고, 노동자의 현실은 그대로였습니다. 2018년 서부발전 태안 화력발전소에서 일하시던 김용균 씨가 작업 중에 컨베이어 벨트에 끼어 숨지신 사망사고는 나라를 떠들썩 하게 했습니다. 기업이 사람을 고용하고 관리하는데 돈을 덜 들이고, 해고를 하기 위해 다른 회사에 일을 넘기는 위험의 외주화와 비정규직은 우리 사회에 너무 많습니다. 또, 배달 앱의 등장으로 배달원들이 많은 갑질에 시달리고 있고, 이들은 플랫폼일 뿐이기에 하소연할 회사 또한 없습니다. 이런 비정규직, 위험의 외주화는 우리 사회가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았고, 많은 노동자가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회가 노동을 대하는 태도는 나를 대하는 것과 같기에 우리는 나만큼은 인간적인 노동의 대우를 받겠지? 라는 생각을 버리고, 다수가 목소리를 내어서 모두가 인간적인 대우를 받으며 노동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회사와 노동자가 갈등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 있습니다. 그중 시간당 임금을 적게 주고, 노동강도를 높여 회사의 이득을 높이게 되는데, 이 행동은 노동자들의 반발을 불러일으키고, 회사와 노동자 간에 갈등을 발생시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회사와 협상을 하게 되는데, 노동자를 대표하는 노동조합이 있다면, 단체교섭을 통해 협상하게 됩니다. 소수의 노동조합이 귀족노조라고 불리며, 국민의 비난을 받기도 하는데, 정확히 말하면 노조는 사용자 측이 노동자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방지하는 임무를 수행하는데 단체입니다. 지난 수십 년간 노동자들은 회사의 노동 착취, 임금 체불, 작업환경 기준 미달, 갑질 등을 해왔기에 이를 방지하고자 노동자들이 좋은 의미로 만들게 되었습니다.

 

대한민국은 학교에서 강도 높은 노동교육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노동조합의 순기능을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독일학교에서는 노동교육을 매우 확실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론뿐 만 아니라 노동조합과 사용자 측의 임금협약을 비롯해서 기본협약, 노동조합이 발표한 성명서를 토론을 통해 배우게 됩니다. 직접 교섭을 해보면서 노동조합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고 합니다. 한국 사람들의 눈에는 학교에서 왜 학생들에게 저런 것을 가르칠까? 라며 의문을 들게 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 노동교육이 사회 전체에 이익이 되고, 삶의 질 향상에 많은 도움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프랑스와 일본 미국 등 선진국은 이런 교육을 시행하고 있으며, 이런 교육을 받고 노동자를 비롯한 경영자, 언론인이 되었을 때와 교육 없이 되는 것은 노동문제를 이해할 때 너무나 다르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사회는 점차 선진국이 노동문제에서 겪었던 것을 느리지만, 비슷한 양상으로 발전하고 있으며, 이는 정말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사건으로 알 수 있다. 다른 나라에서는 교사는 노동자라는 인식이 있고, 당연하게도 노조가 있습니다. 그러나 설립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교사는‘노동자’라는 인식이 잡혀 있지 않았고, 노동조합의 가입 했다는 이유로 해임되었습니다.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전국교사노동조합은 있으며 대법원에서 정식으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이와 비슷한 사례로 공무원 노조가 있고, 노조 가입의 이유로 많은 공무원이 징계 되었지만,전국교사노동조합처럼 노조의 설립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점점 노동의 가치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변화하고 있고, 노동조합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달라지는 지금, 우리는 희망의 신호들을 보고 있습니다. 햄버거 가격보다 낮았던 최저 임금은 10년 만에 8,000원대로 오르고, 플랫폼노동연대가 만들어져 배달 기사분 들의 서러움을 해결했습니다. 그리고, 택배기사분들은 이제 개별사업자가 아니라 노동조합 설립이 가능한 근로자로 인정받은 법원 판결, 그리고 김용균법 통과까지 많은 희망의 신호가 보입니다. 위험의 외주화를 방지하고, 회사의 이익이 아닌 노동자의 목숨을 더 소중하게 여기는 대한민국 사회로 변화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주당 52시간 실시를 통해 노동자들의 건강을 지키며, 밤에도 불이 꺼지지 않는 대한민국이 밤에는 불이 꺼지는 대한민국으로 변화되고 있습니다.

 

또한, 정부 정책을 실시할 때 일자리 수가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자리의 수보다는 노동의 질이 중요하다고 느꼈고, 회사 또한 변화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용자 측이 노동자가 원하는 부분을 요구하기 전에 먼저 인지하여, 해결해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또한 속하지 않는 노동자들의 목소리도 들어 줄 수 있는 환경이 되어야 합니다. 노동조합에 포함되지 않는 노동자들은 회사의 보복이 두려워 말을 하지 못하는 환경이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우리 사회가 노동자들을 더 대우해 주며 사회의 인식이 대한민국 국가대표 선수처럼 노동자 또한 그럼 대우를 받고자 하는 마음으로 독후감의 제목을 대한민국 국가대표는‘노동자 이다 라고 지었습니다. 실업계고를 재학하면서, 학교에서 노동교육의 필요성을 정말 많이 느낍니다. 실업계고 학생들은 3학년 2학기에 실습을 나가고, 취업하게 되는데 노동조합에 대한 교육이 학교에서 이루어지지 않아서 조금 아쉽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제 친구들이 노동자라며 차별받지 않는 사회, 회사의 갑질 없는 사회, 임금 체불 없는 사회, 노조 가입에 눈치 보지 않는 사회가 되기를 정말로 희망하며 독후감을 마치겠습니다.

 

<심사평>

실업고생의 실체험과 연결된 내용이 진정성이 느껴졌다.

건조한 문체지만 노동, 노동조합의 필요성에 대해서 잘 역설하고 있다.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은유, 돌베개)를 읽고”   곽진산(특별상 일반인 부문 수상)

 

 

나도 한때는 ‘동준’이었다. 허가보단 금지의 기준이었던 주민등록증을 가지고 대형백화점의 주차장 안내원으로 일했었다. 지금은 많은 인원이 필요 없어진 직업이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발 디딜 틈 없는 지하 1~3층 주차공간에 차를 욱여넣기 위해선 기꺼이 발로 뛸 사람이 필요했다. 난 손님이 모르게 떠난 주차공간을 찾아 다음 사람에게 안내하는 일을 맡았다.

 

백화점을 방문한 고객은 대개 이곳의 주차난을 이해하고자 노력하지 않는다. 우리는 손님과 달리 두 다리로만 이곳에 서 있지만, 주차공간이 나지 않는 것의 책임은 오롯이 우리가 진다. 사실상 주차장의 주된 업무는 이들의 짜증을 듣는 일이다. 세상엔 생각보다 점잖지 않은 이들이 많다는 사실도 이때 깨달았다. 선생님과 부모님의 보호가 사라진 후 처음으로 듣는 일반인들의 공격은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아이가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았다. 이곳을 찾은 많은 이들이 3개월을 버티지 못하고 퇴사했다. 그 90일은 자연스럽게 인간의 나약함을 판단하는 기준선이 됐고, 족히 10살은 많았던 형들은 지하 주차장에서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에 대해 서로 내기를 걸기도 했다. 옆 백화점 푸트코트에서 파는 3900원짜리 케밥을 걸고 말이다.

 

약속된 90일이 지났고, 난 그들로부터 동료의 취급을 받았다. 악착같이 그 약속의 시간은 견뎌냈으나, 거기까지가 내 한계였다. 주차장은 물리적인 위치만 낮은 곳이 아니다. 이곳에 일하는 이들은 지상으로부터 온 손님들로부터 하찮은 취급을 받는다. 쓰레기를 주고 가거나, 열등한 존재로 보듯 무례하게 말을 건네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끔찍한 것은 그들의 행동과 말투가 나에게 전이되는 것이다. 통장에 새겨진 숫자는 점차 늘어나는 반면, 내 인격은 가파르게 훼손돼 갔다. 어느 날 가족에게까지 우울함을 전파하려던 즈음에 난 일을 그만뒀다.

 

우리는 대개 이런 어린 나이에 인생을 걸만한 직업을 찾지 못한다. 경험도 부족하고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도 단편적이기 때문이다. 나 또한 그런 전형적인 모습의 아이였다. 그래서 아이들에게는 충분한 시간을 두고 경험을 쌓는 시간이 필요하며, 그것이 나의 성격과 행동 습관에 맞는지를 지속해서 반추해야 할 시간이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난 지하 주차장에서 도망쳤다. 하지만 누구나 이런 선택을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누구는 도망치지 못하고 그곳에 남아 버텨야 한다. 내가 떠난 지하 주차장에는 아직도 환멸의 시선과 싸우는 ‘OO’이 있다. 그런 측면에서 나의 도망은 지하 주차장에서의 ‘노동 실태’가 나아지는 데 전혀 기여하지 못했다. 그저 대체됐을 뿐이기 때문이다.

 

“인생은 잘되는 것도 있지만 잘 안 되는 것도 있고 배신, 치욕, 수치, 이런 부분들이 엮여서 하나가 돼 흘러가는 건데 저부터도 그랬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김석경(김동준 어머니)-

 

어떤 ‘동준’은 그곳에 남았다. 누구는 도망치고 버렸을 그 직업을 말이다. 아마도 동준이 오기까지 그곳엔 수많은 ‘우리’가 있었을 것이다.

 

그럼 우리는 도망친 이후 어떻게 살고 있나. 과거의 도망은 되레 ‘성공 신화’의 재물로 포장된다. 실제로 많은 이들, 흔히 사회에서 성공했다고 여기는 이들은 과거 자신이 일했던 지하 주차장의 경험을 설파한다. 그곳에서 어떻게 버텨냈는지가 노력의 성공담으로 포장돼 여러 SNS를 통해 팔려나간다. 이는 다시 확대재생산의 과정을 거쳐 사회계급을 더욱더 공고히 한다. 이러한 성공담은 사람들에게 지하 주차장을 딛고 올라서야 한다고 믿게 만드는 것이다. 지하 주차장에 실패한 인생이 모이는 곳이 되는 이유다. 이곳엔 동준이 있고, 또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이 있는데도 말이다.

 

난 주차장에서 도망쳤다. 더 앞서선 공업고등학교에서 도망쳐 인문계로 왔고, 몸을 쓰며 일하는 곳에서 도망쳐 사무직으로 왔다. 우리가 흔히 여기는 편견의 상징들로부터 도망치면서 살았다. 나도 동준이었던 때가 있었고, 나를 비롯한 우리는 그런 경험을 아주 작게나마 경험했을 것이다. 그때마다 우리는 그곳에서 ‘탈출’만을 바랐던 것은 아닐까. 그곳의 실태를 조금이나마 나아보게 바꿔보겠다는 시도조차 하지 않고, 그 경험을 했던 나조차도 편견을 거두지 않았다. 어쩌면 이 책에서 언급되는 사회적 편견, 그것은 바로 나로부터 시작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아이의 죽음>을 덮고 나자 슬픔보다 부끄러움이 더 느껴졌던 이유다.

 

사실 외면하고 싶었다. 특성화고에 대한 편견? 요즘 누가 그런 편견을 가지냐며 쉽게 치부했다. 그러나 내 과거의 탈출과 도망의 이야기를 다시 꺼내봤을 때, 오히려 이런 생각이 사회의 편견을 더 견고하게 만드는 데 일조하지 않았나 싶다. 특성화고의 아이들이 겪는 자신감 결여, 그로 인해 직장 내에서 겪는 자존감 하락은 모두 위선의 태도에서 비롯된 셈이다. 난 ‘어떤 아이들’을 외면하면서 살았지만, 결국 나의 외면이 그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하나의 잔인한 시선이 됐다.

 

도망의 시선은 단순히 편견만 조장하지 않는다. 앞으로 나타날 ‘동준’이 겪을 위기도 전혀 감지하지 못한다. 누구는 동준이를 그저 실패자로 규정한다. 왜 도망치지 않았느냐고 묻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왜 너는 맞지도 않는 옷을 입고 고통스러웠냐고 되물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모든 질문은 우리가 ‘탈출의 시선’으로만 세상을 바라봤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우리는 다시 질문해야 한다. 동준이가 왜 그런 취급을 받았어야 했는지 말이다.

 

‘동준’은 하나의 사례가 아니다. 이 책은 동준과 어떤 보이지 않는 아이들을 둘러싼 슬픔을 기록했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주변을 배회하는 또 다른 ‘동준’의 죽음을 막는 일이다. 이 글을 써가는 도중에도 건설 현장에서 이름 모를 노동자들이 목숨을 잃었고, 또 어딘가에선 아주 높은 확률의 죽음을 쥐고서 직장 생활을 유지할 아이들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자꾸 ‘알지 못하는’이라는 수식어가 눈에 밟혔다. 은유 작가는 어머니와의 대화서 슬픔을 나누는 일의 중요성을 깨달았다고 한다. 하지만 나로선 남의 뼈저린 슬픔을 권유하는 일이 과연 마땅한 일이었을지에 대해서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런 ‘냉정한 관심’은 비극의 역사를 멈추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늘 우리는 그렇게 행동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어렸을 때를 회상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경험은 하나의 소중한 사례가 된다. 시혜적인 시선으로 동준을 바라보면 우리는 매번 비극의 주차장을 양산하게 된다. 우리는 각자가 경험한 주차장의 세계가 있다. 그곳도 충분히 인격적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은 그때의 기억을 섬세하게 재현하고 어른이 되어 반복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행동 양식이 있어야만 자식을 판자촌에 데려가 “공부하지 않으면 이렇게 살게 된다”고 훈육하는 어른이 되지 않는다.

 

생택쥐페리는 <어린왕자>에서 “어른들은 누구나 처음엔 어린이였다. 그러나 그것을 기억하는 어른은 별로 없다”고 적었다. 과거의 나를 ‘기억하는 어른’, 어쩌면 또 다른 동준의 죽음을 막는 일이 아닐까.

 

<심사평>

과거 자신이 또 다른 동준이었다는 이야기로 시작하여 솔직하고 진실된 마음이 느껴졌다. 과거를 외면하고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기억하는 어른이 되어 동준이와 같은 죽음들을 막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 공감하게 되었다.

임욱영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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