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에 한 번은 뜨거운 감자 격인 이슈가 타오르는 한국에서 화두를 꼽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공정이 그런 키워드 중 하나였음을 부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사실 공정은 작년 한 해 뿐 아니라 수년에 걸쳐 청년층이 목소리를 낼 때 가장 자주 언급되는 단어이기도 했다.
이 공정 논란을 두고 많은 갑론을박이 있어 왔다. 공정에 관련된 불만에 적극적으로 동의하는 측에서는 현 정부의 정책이 일종의 ‘공정감수성’이 더 뛰어난 세대인 청년층을 자극한 결과라고 해석했다. 결과의 평등을 해치는 지금의 정부 정책이 청년들로 하여금 우리 사회를 노력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 따르지 않는 사회라고 좌절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물론 그런 불만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이런 불만은 발언권을 지닌 일부의 불만에 불과하며, 오히려 그들은 가정의 지원을 잔뜩 받아놓고서도 그것을 오롯이 자신의 능력으로 생각하는 ‘능력주의의 함정’에 빠져 있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출처=이미지투데이
이렇게 현재진행형인 대립되는 두 입장 사이에서 정답을 찾기란 어려워 보인다. 하지만 그럴수록 질문에 한 번 더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사람들은 왜 ‘공정’을 중요시할까? 공정론을 긍정하는 쪽이든 부정하는 쪽이든 이 질문에 대한 답부터 먼저 구할 필요가 있다. 아마 우리 사회가 꼭 지켜야 하는 가치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해석과 주장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렇듯 공정에 관하여 흔히 언급되는 논의의 초점, 즉 가치의 문제에서 한 발 비껴서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가치 이전에 좀 더 실제적인 이유로 공정을 중요시한다는 것이다.
공정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예측가능성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인간에 비해서 도덕 가치의 발달이 미약한 침팬지들도, 같은 일에는 같은 보상이 따라와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렇지 않다면 화를 내곤 한다. 그럴 수밖에 없다. 우리가 어떤 노력을 기울일 때, 노력에 따라 어떤 보상이 올지 예측할 수 없다면 우리는 충분한 노력을 기울이기를 망설일 것이다. 큰 노력을 들여봤자 변변찮은 보상이 올 경우 들인 비용은 아무 의미가 없어진다. 이렇듯 우리 인간이 어떤 일에 우선순위를 정할 때는 예측가능성이 필수적이며, 사회가 제공하는 예측가능성을 우리는 공정이라는 이름으로 합의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그런 예측가능성은 시스템 자체가 정의롭냐의 문제와는 별개일 수 있다. 가정 형편에 따라 입시, 취업 결과가 양극화되는 것은 정의롭지 못한 일이지만 충분히 예측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어쨌든 지위를 쟁취해야 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갖는 예측가능성이 당장 훼손되는 것이 부당하고 ‘공정’하지 못한 일이라고 불만을 품을 수 있다. 자신들의 기대가 무너진 것이기 때문이다. 공정론 비판자들의 공정한 경쟁이 허상이라는 주장과 공정론 옹호자들이 주장하는 공정성을 외치는 일부 청년층의 불만은 충분히 통할 수 있는 것이다.
예측가능성을 중심에 두고 생각하면 기존 시스템을 바꾸는 데 반발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청년층이 예측가능성의 훼손에 불만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모든 개혁과 변화는 예측가능성의 훼손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 만약에 예측가능성을 훼손하면서도 시스템을 바꾸고 싶다면, 새로운 곳에서 기회를 열어주어 예측가능성의 훼손을 그들의 이익으로 생각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이 말은 곧 청년층에게 더 자유롭고 개방된 기회를 주어야지만 공정에 대한 그들의 불만을 달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런 기회를 주기 위한 개혁은, 다시 한 번 한국 사회 전반의 예측가능성을 훼손시킬 수밖에 없다. 어쩌면 현대 사회는 연옥에 갇혀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