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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부장제라는 재난을 버티는 중입니다

이장(move the grave, 2019)

등록일 2020년09월11일 14시49분 트위터로 보내기 네이버 밴드 공유

한국 독립영화는 올해에도 여성 서사들이 강세다. 지난해 국내외 영화제에서 59관왕을 수상하며 화제를 모은 <벌새>는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적지 않은 관객수를 동원했다. 이후 <82년생 김지영>, <윤희에게> 등 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영화들은 꾸준히 대중의 선택을 받았고 올해 <찬실이는 복도 많지>와 <이장> 그리고 <야구소녀>로 이어졌다. 그중 <찬실이는 복도 많지>와 <야구소녀>는 영화감독의 꿈이 좌절되고 마흔 살이 된 여성 프로듀서와 실존하는 여성 야구 선수를 통해 유리 천장으로 대표되는 세계를 다룬다. 이 영화들은 굳이 여성 영화로 묶지 않더라도 희소성 있는 여성 캐릭터와 영화, 야구라는 낯선 소재로 어느 정도 관객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요소를 가지고 있다. 반면, 아버지의 묘를 이장하게 된 다섯 남매의 이야기를 담은 <이장>의 주목은 다소 흥미로운 지점이 있다.

 


영화 <이장> 스틸 이미지
 

<이장>은 현재까지 4,866명(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의 관객을 모았다. 백만, 천만으로 집계되는 상업영화와 비교할 순 없겠지만 일반적으로 독립영화는 관객 1만 명에 도달하면 축하 파티를 열곤 한다. 코로나19 사태로 인적이 끊긴 극장가에서, 심지어 전국적으로 82개의 상영관만을 확보한 독립영화가 5천 명의 선택을 받았다는 사실은 무시할 수 없는 성과라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영화는 다수의 국내외 영화제에서 러브콜도 받고 있다. 제20회 전주국제영화제 한국경쟁부문 수상을 시작으로 다수의 독립/여성 영화제에 초청됐으며 제35회 바르샤바국제영화제에서 한국 최초로 신인감독 경쟁대상 및 넷팩상을 동시에 수상했다. 또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과 함께 북미 최대의 아시아 영화 전문 매체인 AMP(Asian Movie Pulse)에서 올해의 아시아 영화 TOP 25에 선정되는 등 해외에서 반응도 심상치 않다. 어떤 판타지도 없는 일상의 풍경에서, 가족을 소재로 한 영화가 보여준 설득력은 어디에 있을까.

 

영화는 재개발로 사라질 아버지의 묘를 이장하기 위해 네 자매가 고향길에 오르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오남매 중 막내(승락)은 연락이 두절된 상태다. 고향인 섬마을에 도착하자마자 ‘장남이 없으면 절대로 무덤을 팔 수 없다’는 숙부의 불호령이 떨어진다. 네 자매는 승락을 찾아 다시 뭍으로 나서고, 잠적한 승락을 찾는 과정에서 그의 아이를 임신한 여자 친구(윤화)를 만나게 된다. 이 영화가 여성 영화로 분류되는 데에는 네 자매에 대한 묘사에 있을 것이다. 남편과 사별하고 홀로 아이를 키우는 장녀, 시댁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남편의 외도마저 알게 된 둘째, 마마보이와 결혼을 준비하는 셋째, 급진적인 여성운동을 하는 대학생 넷째는 한국 사회에서 억눌린 여성들을 대표한다. 이들은 오직 아들을 낳기 위해 진행된 가족계획의 결과물이자 아들만 옹립되던 유년기를 함께 통과한 동지다. 하지만 영화가 전개되는 동안 네 자매는 연대하기보다는 서로의 상처를 건드린다. 윤화 역시 여성 서사의 중요한 캐릭터다. 승락에게 낙태 수술비를 받기 위해 가족과 동행하게 되는 윤화는 이장에 따르는 보상금 500만원을 두고 자매들과 신경전을 벌인다.

정승오 감독의 <이장>은 일련의 여성 서사 영화와는 조금 다르게 읽힌다. 가부장적인 세계를 담은 가족 영화들의 전형이 남성과 여성의 구도 혹은 폭력과 파국의 엔딩이라면 <이장>은 그런 것으로부터 가능한 멀리 떨어진 영화일 것이다.

 


영화 <이장> 스틸 이미지


<이장>의 남성(아버지)들은 부재하거나 말이 없다. 영화의 초반부에서 장독을 깨며 장남을 찾던 숙부는 이후 갈등이 고조되는 매 장면에서 침묵하거나 헛기침만 한다. 윤화의 임신 사실을 알고 잠적했던 승락은 측은함마저 느껴질 만큼 무력하고, 장남으로서 주어진 어떤 역할도 수행하지 못하는 존재다. 영화는 가부장제의 질서를 수호하며 살아온 남성들을 무기력하고 쓸쓸하게 묘사한다. 화장이 아닌 매장을 해달라는 아버지의 유언이 자식들에게 무시되거나, 마른 고목 같던 숙부가 무덤을 번호로 호명하는 묘지 관계자에게 번호가 아닌 이름을 불러달라고 요청하는 장면들은 왠지 멈칫하게 된다. 정승오 감독의 인물들은 가해자-피해자의 구도에 놓였다기보다는 가부장제라는 재난에 던져진 것처럼 보인다. 장녀(혜영)의 어린 아들(동민)만이 이 재난에서 무관한 것처럼 인물들 주변을 배회한다. 죽은 아버지가 미국에 있다고 믿는 동민은 아버지를 그려보라는 선생님에게 저항하거나 틈만 나면 숨바꼭질을 벌이고 가출을 해 가족들을 긴장시킨다. 섬마을을 탐험하듯 배회하다 찾아 들어간 오남매의 옛집과 무덤에서 수습되는 할아버지의 유골을 무표정하게 바라보는 장면에서 동민은 가부장제로 진통을 겪는 시대를 조용히 응시한다.

 


영화 <이장> 포스터

 

이 영화에서 단 한 장면을 꼽는다면 우여곡절 끝에 모두 모인 가족이 아버지의 무덤 앞에 선 장면일 것이다. 추모공원 관계자는 이장을 서둘러야 한다고 재촉하고 수술비를 받기 위해 대기 중인 윤화가 이를 지켜본다. 무덤을 파헤치기 전 마지막 제사가 시작되려는 즈음, 별안간 벌의 공격으로 주위는 아수라장이 된다. 이 소동으로 발을 헛디딘 승락은 길 바깥으로 추락해 병원에 실려 가고 만다. 장남이 사라진 제사는 중단되고, 헛기침만 계속하던 숙부는 긴 침묵의 끝에 장녀인 혜영에게 제사를 맡긴다. 가부장제가 유일하게 패배하는 순간이다. 이장을 무사히 마친 가족들이 어색한 작별을 하고 윤화와 승락은 깊은 대화를 나눈다. 영화도 문을 닫을 준비를 한다. <이장>의 포스터엔 ‘세기말적 가부장제에 작별을 고한다’는 도발적인 헤드 카피가 있다. 뚜껑을 열어보면 갑자기 날아든 벌 한 마리만이 세기말적 가부장제에 상처를 입힌다는 이 웃픈 결말은 <이장>이 시종일관 보여준 유머를 요약한다. 무겁고 고단한 사연을 가진 영화는 실은 내내 유쾌하다. 마치 벌 한 마리면 충분하다는 듯한 태연함이 있다. 어설픈 통찰보다는 가부장제라는 재난을 굳게 버티고 서 있는 몸들의 떨림을 들여다본다.

 

<이장>의 전사는 이 영화를 연출한 감독의 단편 <새들이 돌아오는 시간>에서 찾을 수 있다. <새들이 돌아오는 시간>(인천영상위원회 홈페이지 온라인 상영중)에는 투병 중인 엄마의 병실로 오랜만에 찾아온 네 명의 딸과 말없이 간병만 하는 아버지가 등장한다. 대화에 서툰 가족이 벌이는 한나절 동안의 긴장감을 담는다. 미숙한 대화가 서로에게 상처를 남기고 알 수 없는 연민이 그 상처를 봉합하는 묘한 순간을 포착해낸 이 작품의 인물들은 <이장>에서 확장된다. “사람들이 헐뜯고 싸우다가도 연대하게 되는 희한한 순간들이 있다. 설명할 순 없지만 받아들이게 되는 그 힘에 관심이 있다. 그런 힘을 도모해내는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는 출사의 변을 들고 나온 정승오 감독의 첫 장편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최성규(한국독립영화협회 비평분과)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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