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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혹적인 이야기의 쓸쓸한 결말...김씨표류기(Castaway on the moon)

최성규(한국독립영화협회 비평분과)

등록일 2020년07월30일 17시02분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천하장사 마돈나>의 동구(류덕환)는 성전환 수술비를 벌기 위해 씨름부에 들어간다. 마돈나처럼 섹시한 여성이 되고 싶은 동구가 가진 유일한 재능은 하필이면 씨름이었다. 500만 원을 손에 쥐기 위해선 인천시 고등부 씨름대회에서 우승하는 방법밖에 없다. 어쩔 수 없이 남학생들 사이에서 맨 살을 맞대고 모래에 처박혀야 한다.

 

<나의 독재자>에서 성구(설경구)는 스스로를 김일성이라 믿는다. 군사정권은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리허설에 쓸 배우를 찾고 있다. 무대 공포증으로 설 자리가 없던 연극배우에게 이 무대는 다시 오지 않을 기회인 것만 같다. 회담이 연기된 지 20여 년이 흘렀지만 성구는 언젠가 찾아올 단 한 번의 연극을 위해 기꺼이 김일성이 되어있다.

 

한국사회의 높은 벽과 그 안에 갇힌 인물들

 

이해준 감독의 인물들은 영화 속에서 섬처럼 놓인다. 섬의 위치는 짐작할 필요도 없는 대한민국의 한복판이다. 동구는 한국 남성들의 육체가 전시되는 씨름판에서, 성구는 반공 이데올로기에 물든 남한 사회에서 표류하는 섬처럼 존재한다. 이해준의 영화가 주목하는 것은 좀처럼 무너지지 않는 한국사회의 높은 벽과 그 안에 갇힌 인물들이다. 구조조정으로 실직한 뒤 사채로 거액의 빚을 지고 한강에 투신하는 승근(정재영)과 학창 시절에 얼굴 흉터로 왕따를 당한 뒤 은둔 생활을 하는 승연(정려원)의 이야기가 교차로 편집되는 <김씨표류기>의 세계도 다르지 않다.

 


<김씨표류기> 출처::네이버영화

 

영화 속에서 승근은 마포대교에서 투신한 뒤 밤섬에서 눈을 뜬다. 등 뒤로는 우거진 숲이 있는 무인도지만 강 건너엔 초고층 빌딩들이 보이는 낯선 풍경이다. 지나가는 유람선의 승객들을 향해 소리쳐 봐도 건조한 손 인사만 돌아오고, 119 구조센터는 구조요청을 장난으로 취급한다. 배터리가 얼마 남지 않은 휴대폰으로 걸려온 마지막 전화 속에서 텔레마케터가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낸다. 타인의 안부 따위는 신경 쓸 겨를이 없는 서울 한복판에서 표류된 것이다. 섬에서의 탈출과 자살 시도가 번번이 실패하고 하룻밤을 보낸 승근은 비로소 모든 관계로부터 해방감을 느끼게 된다. 섬 생활에 점점 익숙해지던 어느 날, 버려진 짜장 라면의 분말스프로부터 시작된 욕망은 무기력했던 그를 바꿔놓는다.

 


<김씨표류기> 출처::네이버영화

 

이를 지켜보는 또 하나의 섬이 있다. 승연의 세계는 좁은 방과 SNS가 전부다. 커튼이 쳐진 어두운 방에서 인스턴트 음식을 먹고 제자리걸음으로 운동을 하거나 SNS로 하루를 보내는 일상을 반복한다. SNS 속 그녀는 아름다운 얼굴로 명품을 쇼핑하지만 날이 저물고 어머니가 퇴근하는 소리가 들려오면 장롱으로 들어가 잠을 청한다. 그런 승연에게도 특별한 날이 있다. 일 년에 두 번 봄가을, 20분간 세상이 멈추는 민방위 훈련의 날이다. 훈련이 시작되면 커튼을 열고 카메라 너머 창밖을 본다. 거리엔 사람이 없고 모든 게 멈춰있다. 중력이 사라진 것 같은 고요함과 찬란한 오후의 햇살이 뷰파인더를 통해 눈으로 들어온다. 어느 날, 강 건너 밤섬의 모래사장에 쓰인 ‘HELP’와 나무에 목을 매려는 승근을 발견한 순간 그녀의 루틴에 균열이 생긴다.

 


<김씨표류기> 출처::네이버영화

 

낭만에 취해 있다가 갑자기 눈앞에 다가온 현실

 

<김씨표류기>는 빈곤과 편견으로 각각 고립된 두 인물을 다룬다. 그들의 구조 신호는 어디에도 수신되지 못하고 떠돌다가 운명처럼 서로에게 닿게 된다. 두 사람은 유리병에 담긴 편지와 모래사장에 쓴 따뜻한 낱말들로 조심스럽게 소통한다. 이해준의 영화가 그래 왔듯 <김씨표류기> 역시 약자들의 서사가 담겼지만 그의 어떤 영화보다 낭만적이다. 잿빛 도시로부터 생기와 상상을 길어 올린 아름다운 이야기와 단 한 개의 씬도 낭비되지 않고 빛과 어둠을 매혹적으로 그려낸 모든 장면들은 눈을 사로잡는다.

 

또한 곳곳에 배치된 위트 있는 상징과 묘사도 흥미롭다. 이를테면 승근의 섬 생활이 물고기를 잡고 들풀을 뜯어먹던 수렵과 채집의 방식에서 짜장면을 먹기 위해 곡식을 재배하기 시작할 때 인간 사회의 진화를 본다거나, 사람이 살지 않는 달을 흠모하며 촬영하던 승연이 헬멧을 착용하고 조심스럽게 밖으로 나오는 모습에서 우주를 탐사하는 인류가 겹쳐 보이는 것들이다. 그 밖에도 밤섬을 비롯해 한국에서만 존재한다는 짜장면, 민방위 훈련 같은 지정학적 장치들을 비롯해 섬으로 흘러들어온 쓰레기들이 기발한 소품으로 활용되는 과정은 무거운 주제를 유머로 통과하는 <김씨표류기>만의 화법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의 결말은 어딘가 쓸쓸하다. 밤섬에서 쫓겨난 승근은 다시 생을 마감하기 위해 63빌딩으로 향하는 버스에 오른다. 승연은 이를 지켜보다 밖으로 뛰쳐나와 버스를 따라 뛴다. 낯선 사람들이 즐비하고 태양빛이 작열하는 한낮의 거리를 거침없이 질주한다. 기적처럼 민방위 훈련이 시작되고 멈춘 버스 안에서 승근과 승연은 처음으로 만나게 된다. 그리고 이야기는 거기서 멈춘다. 그들이 조우할 때까지 관객과 함께 뛰던 영화는 두 사람이 만나 인사를 나눈 순간, 그 다음 이야기의 어떤 기대도 허락하지 않고 엔진을 꺼버린다. 한강의 무인도라는 공간이 주는 기묘함이나 직접 재배한 옥수수로 짜장면을 만들어 먹을 때의 쾌감보다 마음을 흔드는 건 마지막 장면이다. 강을 조망하는 고층아파트에 살지만 사회적으로 단절된 히키코모리와 한강 다리에서 몸을 던져 떠내려 온 무력한 사내가 긴 이야기의 끝에서 만나 서로의 안부를 물을 때였다.

 

영화는 문을 닫았으나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 다음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민방위 훈련이 끝나면 버스는 출발하고 63빌딩을 향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버스에서 내렸을까. 내렸으면 어디로 가야 할까. 모르겠다. 낭만에 취해 있다가 갑자기 현실이 눈앞에 다가와 있다. 영화 속에서 희망으로 명명된 짜장면이 코로나의 시대에 자가 격리된 장애인의 집 앞으로 배달된 생쌀처럼 덩그러니 놓여있다. 매혹적이었던 그들의 표류기마저 극장 안에 갇힌 것만 같다.

 

영화의 의도와 상관없이 현실을 목도하게 되는 결말은 쓸쓸하다. 마음껏 상상했던 <김씨표류기>의 마지막은 어쩐지 텅 빈 것 같지만 고백처럼 느껴진다. 한국사회의 편견과 제도의 공고함 앞에서 머뭇거리는 영화에게 책임을 물을 순 없다. 오히려 그 망설임이 반가우면서도 아름다운 영화가 끝났다는 사실이 다만 서글프다.

 

#김씨표류기 #정재영 #정려려원 #사는게모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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