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 예수, 석가, 소크라테스를 세계 4대 성인(聖人)이라고 이야기한다. 예수와 석가는 세계 3대 종교 중에서 기독교와 불교의 창시자이고 공자도 동아시아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유교의 시조인데 소크라테스는 후대에 어떤 영향을 미쳤기에 이들과 같은 반열에서 회자되고 있는 것일까?
소크라테스는 기원전 470년 경 아테네에서 태어나 기원전 399년에 사망하였다. 이 당시 아테네는 페르시아 전쟁을 승리로 이끌며 고대 희랍세계를 주도하는 전성기를 구가하다가 펠로폰네소스전쟁의 패배로 쇠퇴를 맞게 된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조국인 아테네의 번영과 쇠락을 직접 겪는다. 급격한 사회의 변화는 사람들에게 기존의 가치관과 질서를 의심하게 만든다. 이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새로운 사상과 이론, 그리고 주장이 난무하게 된다. 후대인들이 소피스트(sophist)라 부르는 사람들이 이 시기에 나타나는데 소크라테스도 그 중 하나이다.
다른 시공간에서라면 수 백 년 이상의 시간동안 벌어질 급격한 변화를 온 몸으로 겪으면서 소크라테스는 이전의 인류가 묻지 않았던 새로운 물음을 던진다. 그것은 인간 자체에 대한 물음이다. 이 물음을 조금만 더 구체적으로 한다면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이다. 이는 용기, 지혜, 정의, 경건 등 구체적인 인간의 덕목에 대한 탐구로 이어진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덕목에 대해 알고 있다고 여기지만 조금만 깊이 생각해보면 각각의 덕목이 무엇인지 설명하는 것은 쉽지 않다.
용기에 대한 예를 들어보자. 소크라테스는 ‘라케스’라는 당대의 명장에게 용기란 무엇인지 물어본다. 그는 적 앞에서 물러나지 않는 ‘임전무퇴’의 정신이 용기라고 대답한다.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기마민족인 스키타이족의 예를 들면서 작전상 후퇴하거나 게릴라전을 벌이는 경우는 용기가 아닌지 되묻는다. 언뜻 생각하면 강한 적 앞에서 물러나지 않는 것이 용기일수 있지만 때로는 만용일 수도 있다. 그럼 적 앞에서 물러나는 것이 용기인가? 이것도 간단히 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럼 어떤 현상이 용기인지 아닌지 판단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소크라테스는 그 판단을 위해서는 ‘용기’라는 척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마치 길이를 측정하기 위해서 자가 필요하고 수평을 재기 위해서 수평자가 필요하듯이 용기를 측정할 수 있는 ‘용기자체’라는 척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럼 용기를 잴 수 있는 척도를 우리는 어떻게 구할 수 있는가? 소크라테스는 평생을 그 척도를 찾기 위해 캐묻고 다녔지만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죽었다. 그의 제자인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물음을 이어받아 자신이 발견한 척도를 주장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다음 편에서 논하도록 하겠다.
소크라테스는 어느 날 친구를 통해 아폴론이 자신을 아테네에서 가장 지혜로운 자라는 신탁을 내렸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자신은 묻는 자이지만 아는 자는 아니라고 여겼는데 그런 자신을 가장 지혜로운 자라는 신의 이야기를 그는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이런 모순을 풀기 위해 당대에 가장 지혜로운 자라 여겨지는 사람들인 정치가, 장인(匠人), 시인 등을 찾아서 캐묻고 다녔다. 이런 과정에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무지(無知)와 신탁이 모순되지 않음을 깨닫는다. 그것은 자신이 묻고 다닌 사람들이나 자신이나 ‘그것 자체’에 대해 모르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무지(無知)를 알지 못하고 자신은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필자는 이 깨달음이 소크라테스가 4대 성인의 반열에 오른 이유라고 생각한다. 인류역사를 보면 ‘안다고 하는 자’들이 공동체를 파괴한 사례를 무수히 찾아볼 수 있다. 이는 작금의 우리 현실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알고 있다’고 여긴다면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모르는 사람이다. 그럼 그 사람을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나와 같은 ‘앎’에 이르도록 해야 한다. 이는 오직 하나의 신만이 옳다는 유일신의 종교가 배타적인 이유이다. 종교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비슷한 경우를 많이 보지 않는가. 이런 과정을 통해 ‘다름’이 ‘틀림’이 되어간다.
그럼 모두가 모른다면(無知)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이를 삶의 조건으로 받아들이고 서로 다른 ‘앎’을 가지고 있는 자들끼리 자신의 ‘모름’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서로 협조해서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마치 캄캄한 밤길에 여러 사람들이 손을 잡고 산길을 더듬어 가며 산을 넘듯이.
이응구 (‘민주주의자, 맹자와 플라톤’의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