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명진 한국노총 정책본부 국장
디지털화가 불러올 노동의 미래는 유토피아일까, 암울한 디스토피아일까. 인공지능과 자동화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는 이 시대 전세계적인 화두이다. 하지만 기술 자체가 인류사회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라는 이 같은 사고방식 자체가 문제라는 비판 또한 크다. 사회적 제도나 관행, 공동체의 가치체계와 정부정책에 따라 기술이 사회에 미치는 효과가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ILO서 일의 미래 관련 선언 채택 예정
한국의 상황은 어떠한가? 우리나라에서 새로운 기술혁명에 대한 사회적 논의는 정부관료와 전문가집단, 기업이 주도하면서 경쟁력강화와 신성장동력 확보를 위한 기술혁신에 치중되었다. 특히 인공지능과 자동화기술이 불러올 산업과 사회의 변화는 확정된 미래이며 혁신기술을 선제적으로 도입하고 확산하지 않을 경우 한국 경제의 경쟁력이 약화될 것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이를 배경으로 글로벌 플랫폼 기업들에 맞설 수 있는 토종 플랫폼 산업의 성장과 혁신적 스타트업 기업들의 활성화를 위한 제도적 여건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고, 핵심 과제로 은산분리 완화, 규제 샌드박스 도입, 카풀합법화 등 ‘규제완화’가 추진되기 시작했다.
최근 ILO에서 발표한 ‘일의 미래(Future of Work) 보고서’(이하 보고서)는 기술혁신에 대한 논의와 정책이 기술결정론적 시각에 치우쳤던 한국사회에 묵직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보고서는 ILO가 2019년 창립 100주년을 맞아 2017년 8월에 출범시킨 ‘일의 미래 글로벌 위원회’의 논의 결과를 담고 있다. 전 세계 각 지역별로 노조, 기업, 정부, 학자 및 NGO 활동가 27명으로 구성된 글로벌 위원회는 4차례의 집중 토의를 거쳐 2019년 1월 최종보고서를 발표했고, 오는 6월 ILO 총회에서 ‘선언’으로 채택될 예정이다.
보고서는 디지털전환과 이로 인한 ‘일의 세계’의 급격한 변화가 위기와 기회를 동시에 불러일으키고 있음을 지적하고 각 사회가 위험요인을 줄이고 기회를 포착하기 위해서는 사회정의에 대한 사회주체들의 공동의 인식에 기초해 사회적 합의를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특히 경제‧사회정책과 기업의 관행에서 사람과 일을 우선시하는 사회적 합의를 강화하기 위한 ‘인간중심 의제’를 제안하며, 구체적 과제로 ▲평생교육에 대한 보편적 보장, 노동시장 전환 지원 확대, 보편적 사회보장 등 인간능력에 대한 투자 ▲보편적 노동권 보장, 노동시간 자율성 확대, 노사 단체 대표성 보장, 양질의 일자리 증진 등 노동관련 제도에 대한 투자 ▲지속가능한 양질의 일자리를 위한 투자를 제시하고 있다.
ILO 일의 미래 보고서에서 제안한 인간중심 의제
Ⅰ. 인간능력에 대한 투자 확대
- 평생교육에 대한 보편적 수급권
- 일의 미래로의 전환을 지원하는 제도‧정책‧전략에 대한 투자확대
- 성평등을 위한 혁신적이고 측정가능한 의제 이행
- 보편적 사회보호 보장
Ⅱ. 노동 관련 제도에 대한 투자 확대
- 적정생활급, 최대노동시간 제한, 안전하고 건강한 작업환경 등 보편적 노동권 보장
- 노동시간 자율성(시간주권) 확대
- 노사 단체 대표성과 사회적 대화 증진
- 기술 활용‧관리를 통한 양질의 일자리 증진
Ⅲ. 지속가능한 양질의 일자리를 위한 투자 증진
- 지속가능한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하는 주요 분야에 대한 투자 증진
- 장기적 투자 증진하는 인센티브 구조 개편 및 삶의 질‧환경의 지속가능성‧평등 부문 성과 측정 보조지표 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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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중심 의제, 무엇을 담고 있나
인간중심 의제는 기술발전이 불러올 변화를 고정적인 것으로 보고 사람들을 그 변화에 꿰어 맞추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변화를 사람들의 권리와 이익, 자유와 존엄성을 실현하는 방향으로 이끌어야 한다는 철학에 기초하고 있다. 디지털기술이 노동의 유연화와 고용형태의 다변화를 가속화시켜 기존의 노동법‧제도를 무용지물로 만들 수밖에 없다고 보지 않고, 디지털 전환이 초래할 수 있는 사회적 불안정성을 극복하기 위해 노동기본권을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의 보편적 권리로 확장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보고서의 핵심 제안인 인간중심 의제는 향후 디지털 전환에 대한 한국사회의 대응전략과 과제를 본격적으로 마련하기 위한 사회적 논의과정에서 진지하게 검토하고 수용할 필요가 있다. 이 같은 점에서, 최근 경제사회노동위원회에 설치된 디지털전환과 노동의 미래 위원회(이하, ‘디지털위원회’)의 사회적 합의는 기술혁신과 관련된 한국사회의 논의를 인간중심적‧노동참여적 디지털전환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한걸음 진전시켰다는 의의가 있다.
디지털위원회는 작년 7월 새로운 사회적 대화기구 내에 하나의 의제별 위원회로 발족되었다. 소위 ‘4차산업혁명’과 관련된 정책논의와 결정과정에 노동이 배제되는 것을 극복하고 기술혁신과 사회혁신이 조화롭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노사정 주체들이 사회적 대화를 통해 공동의 대응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한국노총의 요구가 큰 배경이었다.
한국노총은 자동화기술로 인한 일자리의 대량 파괴와 격차 심화의 위험성이 존재하는 만큼 노동자의 실질적인 고용안정, 기존 일자리의 보호, 단결권과 교섭권의 확대, 사회안전망의 대폭 확충 등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논의 과정에서 노사정의 시각 차이가 존재했으나, 노동이 배제되고 기술혁신에 편중되었던 기존 정부주도 논의의 한계 및 노사정 주체들의 협력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일정 형성되었다. 카풀앱 등 디지털 플랫폼 확산화에 따른 사회적 갈등을 해소하는데 있어서도 단지 기술혁신과 신산업육성에만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제도적 보호와 사회적 책임을 동시에 강화해야 한다는 방향에도 의견을 함께 모았다. 보다 구체적인 대응전략과 과제가 정리되진 않았으나, 위원회에서 6개월 간의 논의결과를 바탕으로 <디지털 전환에 대한 노사정 기본인식과 정책에 관한 기본합의>를 발표하기로 하여 2개월여 간 추가적인 협의를 통해 지난 2월 18일 디지털위원회는 기본합의안을 마련하였다. 합의문엔 디지털 전환의 의미와 경제‧사회‧노동에 미칠 영향, 노사정의 준비 정도와 주요 과제, 노사정 협력의 필요성과 공동 과제를 담았다.
디지털전환, ‘정의로운 전환’ 돼야
기본합의는 위원회의 발표대로 과거 정부 주도나 학자 중심으로 진행되었던 디지털 전환에 대한 논의를 노사정이 함께 참여하여 공동의 대응 방향을 모색하게 된 점에 가장 큰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기술결정론적 시각과 경제와 기술에 편중된 논의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했다는 점 또한 의미 있는 성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기본합의는 제한된 논의일정 하에서 노사정이 현재 합의가능한 내용들만 담을 수 있었던 만큼, 한계도 분명하다. 디지털화의 그늘에서 장시간노동과 노동착취에 시달리는 수많은 IT 노동자들의 문제와 같이 현재진행형인 문제들에 대해 뚜렷한 답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또한, 재벌대기업위주의 성장정책과, 원‧하청간 불공정거래가 기업들의 혁신을 저해하고, 취약한 사회안전망과 노동권이 노동자들로 하여금 변화에 대한 거부감을 키우고 있는 것과 같이 디지털전환과 관련된 근본적 문제제기가 생략되어 있기도 하다.
한국노총은 보다 다양한 이해당사자들의 직접적인 참여와 이해대변을 통해 향후 계속될 사회적 대화에서 보다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해법을 찾는 한편, 보편적 노동권의 확립과 사회안전망의 확충, 저임금‧장시간 노동체제의 극복을 통해 한국사회의 디지털전환이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정의로운 전환’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