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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밝혀낸 임금의 비밀

임승수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 저자

등록일 2024년08월29일 10시23분 트위터로 보내기 네이버 밴드 공유

일반적으로 우리는 임금이 ‘노동의 대가’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월급은 한 달 일한 노동의 대가이고 시급은 내가 일한 노동 시간만큼의 대가라고 여긴다. 요컨대 자기가 일한 양만큼 돈으로 보상받는다는 얘기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그러한 생각이 잘못됐음을 《자본론》에서 숫자로 풀어서 논증한다. 노동자가 직장에서 받는 임금은 노동자가 수행한 노동량에 비해 필연적으로 적을 수밖에 없으며 그 차액이 자본가에게 이윤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수식으로 밝혔다.

 

예컨대 한 노동자가 하루에 8시간을 일하고 일당으로 6만 원을 받았다. 그러면 우리는 하루 8시간 ‘노동의 대가’가 6만 원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계산하면 1시간에 7,500원이다. 하지만 마르크스의 주장에 따르면 노동자는 원래 1시간에 7,500원보다 훨씬 많은 가치를 창출한다. 노동자가 1시간에 창출하는 가치가 2만 원이라면, 일당으로 받은 6만 원은 3시간에 해당할 뿐이다.

 

하루 8시간의 노동 중에서 3시간에 해당하는 부분만 임금으로 받았으니 추가로 일하는 5시간에서 창출되는 가치 10만 원이 자본가에게 이윤으로 돌아간다. 8시간 노동 중 3시간은 나 자신을 위해 일하지만 5시간은 자본가를 위해 일한다는 뜻이다.

 

어떤 회사에서 100명의 노동자가 이런 조건으로 일하고 있다고 하자. 자본가는 노동자 한 명당 하루에 5시간씩 총 500시간의 노동에 해당하는 가치를 이윤으로 벌어들인다. 이러한 착취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발생하는 극심한 빈부 격차의 원인이라고 마르크스는 날카롭게 지적한다(구체적인 증명 과정은 다소 난해하다. 관심 있는 사람은 나의 책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을 참고하시라).

 

임금은 노동력의 재생산 비용

 

노동자가 받는 임금이 일한 만큼 받는 ‘노동의 대가’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일까? 마르크스는 임금을 노동의 대가가 아니라 ‘노동력의 대가’라고 했다.

 

노동력의 대가라는 표현이 의미하는 바는 이렇다. 인간이 노동할 수 있는 육체적·정신적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의식주를 해결해야 한다. 음식도 주기적으로 섭취해야 하고 의복과 거주 공간도 필요하다. 더불어 자식을 낳아 키울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기존 노동자의 수명이 다해도 새로운 노동자가 끊임없이 수혈되어 자본주의 시스템이 유지될 수 있으니까. 요컨대 노동자의 생존과 번식에 필요한 돈이 바로 임금이다.

 

애초에 일한 만큼 받는 것과 아무런 연관이 없다. 노골적으로 얘기하면 노동자가 죽지 않고 다음 날 나와서 일할 수 있게 만드는 비용이다. 그것이 노동력의 대가, 즉 임금의 진정한 의미다. 노동력의 재생산비용!

 

하지만 노동자들은 자신이 받은 임금이 노동의 대가라고 착각한다. 노동자는 자신이 일한 만큼 받고, 자본가는 회사의 소유자로서 정당한 몫인 이윤을 가져간다고 여긴다. 농노나 소작인이 양반 혹은 귀족에게 착취당하고 수탈당하면서도 신분제 질서를 내면화 및 내재화해서 당연하게 여기듯 말이다.

 

과거에는 종교나 신화가 착취와 수탈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했다면 현대 자본주의에서는 자본가의 사적 소유권을 정당화하고 강제하는 경제학 이론 및 법과 제도들이 그 역할을 한다. 교육 기관과 미디어는 종교적 교리를 주입하듯 자본가 계급의 입맛에 맞는 내용을 반복적으로 세뇌시킨다.

 

부는 공동체 구성원이 함께 이룬 사회적 성과물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측에서는 자본가가 이윤을 취득하는 명분을 이렇게 설명한다. 회사나 공장을 설립하기 위해 자본가가 투자한 ‘자본의 대가’라고 말이다. 회사를 설립하는 데에 자본가 개인의 돈이 들어갔으니 이윤을 가져갈 권한 또한 있다는 얘기다. 대부분 이것을 자연스럽게 여긴다.

 

하지만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다. 노예제 사회의 논리에서는 노예를 부리는 게 당연했다. 신분제 사회에서는 귀족과 평민을 나누는 게 하등 이상할 게 없었다. 그러니 자본주의 사회를 객관적으로 판단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 논리라는 지적 감옥의 바깥으로 탈주해야 한다.

 

이제 마르크스의 논리로 상황을 재해석해보자. 자본가는 자본을 댔으니 이윤을 전부 가져가는 것이 당연한 걸까? 예컨대 내가 A라는 회사를 소유한 자본가다. A를 운영하며 노동자에게 임금을 지급하고 이런저런 비용을 제하고 남은 돈이 내 몫의 이윤이다. 운영이 잘되어 이윤 적립금이 순식간에 불어나고, 그 돈으로 회사 B를 새로 설립했다고 하자. 이제 B에서 발생하는 이윤 또한 전적으로 내 몫이다. 왜냐면 회사 A에서 번 ‘내 돈’으로 회사 B를 세웠으니까.

 

그런데 한번 곰곰이 따져보자. B를 설립하는 데 사용한 자금은 A에서 벌어들인 이윤인데 앞서 마르크스의 분석에 의하면 이윤은 노동자가 자신이 받은 임금보다 더 많이 일하고 그 부분을 자본가가 취득해서 발생한 것이다. 요컨대 회사 A에서 취득한 이윤은 순전히 자본가의 노력과 능력에 의해서 발생한 게 아니라는 의미다. 내가 회사 B를 설립할 수 있었던 것은 회사 A의 노동자를 착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자본가가 투자했다는 자금의 형성 과정을 소급해 분석하면 이윤은 자본가 혼자 잘나서 번 돈이 아니라 타인의 노동이 축적된 결과물이다. 다만 그것이 사적 소유권이라는 현대판 신분제를 통해 자본가에게 ‘합법적으로’ 귀속됐을 뿐이다.

 

이러한 아이디어를 확장해보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형태의 부는 공동체 구성원이 함께 이룬 사회적 성과물이라는 얘기가 성립된다. 한 개인이 뛰어난 지식과 역량으로 놀라운 혁신을 낳는 사례도 있지 않냐고? 그 대단하다는 개인이 가진 지식 대부분은 과거 수많은 사람이 쌓아 올린 지식의 탑에 크게 빚지고 있다. 내 머릿속 지식 중에서 과거 사람들의 열정, 노력과 헌신이 없어도 알 수 있는 것이 과연 얼마나 될까.

 

자본주의는 사회적 협업의 성과물을 소수 자본가에게 몰아주는 불평등한 시스템이며, 이 불평등의 명분과 구실로 사적 소유권이 기능하고 있다. 회사나 공장의 소유자임을 법적으로 인정받게 되면 그는 노동자에 대한 합법적 착취 면허를 취득하는 셈이다. 그러니 자본가 계급이 사적 소유권을 신줏단지처럼 여기는 건 필연적이다. 그 옛적 귀족들이 신분제를 자신들의 생명선으로 여겼듯 말이다. 공동으로 일군 재산임에도 불구하고 사적 소유권만 있으면 마술처럼 내 것이 되니까.

 

그런 맥락에서 본다면 노동자의 임금 인상 요구는 돈 더 달라고 생떼를 쓰는 것이 아니다. 자본가에게 착취당하고 빼앗긴 것의 일부분이라도 되찾아오려는 행동이다.

 

물론 자본가의 회계 장부에서 임금은 비용으로 분류되고 자본가는 이윤 극대화를 위해서 가능한 한 임금 인상을 억누르려 한다. 하지만 그것은 자본가의 사정일 뿐 노동자에게 임금은 어떻게든 늘려야 할 생존 비용이다. 왜 노동자가 자본가의 눈으로 세상을 봐야 하나?

 

평민이 양반의 시각으로 세상을 본다면, 지배당하고 착취당하는 삶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이 노동자가 임금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아야 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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