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롭힘, 갑질, 왕따... 듣기만 해도 소름 돋는 단어들이 일터로 스며들어 심각한 문제로 이어지자 이를 법으로 규율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2019년 7월, 국내에서는 근로기준법,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산업안전보건법 등 노동관계법령에 따라 직장 내 괴롭힘 규제를 하게 되었다. 그보다 약 한 달 전, ILO(국제노동기구)는 제108차 총회에서 일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폭력과 괴롭힘을 근절하기 위한 190호 협약이 채택하며, 국제기준을 마련했다.
법 도입 4년,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직장 내 괴롭힘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은 직장 상사가 지위 또는 관계 등의 우위를 이용해 업무상 적정 범위를 넘어 다른 노동자에게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주거나 근무환경을 악화하는 행위를 금지하는 법이다. 법을 통한 규율은 사용자와 상사에 의한 갑질 사건, 일부 직종에서 악습으로 자행돼 오던 괴롭힘의 결과가 극단적 선택으로 이어진 사건 등을 보며 눈덩이처럼 커진 사회적 공분의 결과였다.
노동인권 보장이라는 측면에서 그 의미가 작지 않은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이 도입된 지 4년, 우리 일터는 괴롭힘으로부터 얼마나 안전해졌을까? 고용노동부에 신고된 직장 내 괴롭힘 건수는 매년 증가해 2022년에는 법 시행 첫해의 무려 3배가 넘는 7,814건에 달했다. 우리 사회에 직장 내 괴롭힘이 얼마나 만연해 있는가를 여실히 드러내는 동시에 지난 4년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괴롭힘이 여전히 우리의 일터를 잠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국노총도 지난 6월, 한국노총 조합원 1,600명을 대상으로 직장 내 괴롭힘 실태조사를 한 결과, 전체의 61.5%, 즉 5명 가운데 3명꼴로 신체적·언어적 폭력과 위협, 사생활 침해, 직장 내 따돌림, 직무배제 등의 직장 내 괴롭힘을 경험한 적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여성은 성별 비하·혐오 발언, 외모 지적 및 품평, 성역할 고정관념, 성희롱 등 직장 내 성적 괴롭힘을 경험한 경우가 절반이 넘어 일터에서의 성감수성 부족이 일하는 여성에게 이중의 괴롭힘으로 작용하고 있음이 증명되었다. 성에 기반한 차별과 괴롭힘의 피해는 성별을 가리지 않았으나 성적 괴롭힘의 가장 대표적인 유형인 특정 성별에 대한 역할 고정관념 강요의 경험은 남녀 차이가 두드러졌다(남성은 16.8%, 여성은 39.4%). 이는 여성에 대한 편견이 노동시장 내에 고착화되었다는 것을 짐작케 하며,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우려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 10월 5일 오전 10시 40분 국회 소통관에서 열린 ‘ILO 제190호 협약 비준 촉구 기자회견’
190호 협약 탄생 그리고 비준의 의미
2019년 6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ILO 제108차 총회에서 8년 만에 새로운 협약이 탄생하였다. ILO는 190호 협약을 통해 일터에서 일어나는 폭력과 괴롭힘을 개인의 정신적·신체적·성적 건강과 존엄, 나아가 가족과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로 규정하고, 기회균등에 대한 위협이자 양질의 일자리와 양립 불가능한 행위로서 반드시 근절되어야 함을 역설했다. 젠더에 기반한 폭력과 괴롭힘을 포함해 모두가 폭력과 괴롭힘이 존재하지 않는 일터에서 일할 권리를 인정하고, 명시한 최초의 국제기준이다.
190호 협약은 189호가 채택된 지 무려 8년 만에 만들어졌다. 협약은 노사정 3자 합의에 기초하기에 어느 한쪽이라도 반대하면 채택되기가 어렵다. 그렇기에 190호의 채택은 일터에서 폭력과 괴롭힘을 추방하고, 상호존중과 인간 존엄을 확립하는데 글로벌 수준에서 노사정 모두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직장 내 괴롭힘은 비단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심각한 문제로서 개인 간의 갈등으로 치부할 수 없는 구조적·조직적 문제가 되었고, 제도적으로 풀어야 할 숙제가 되었다는데 이의가 없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이런 190호 협약의 중요성에 동의하고, 비준한 ‘노동권 존중’ 국가는 영국과 프랑스, 독일 등 총 31개국(2023년 6월 기준)이다. 세계 경제 10위권의 한국은 지금까지 그에 걸맞은 국제적 수준의 노동권 보장을 국제사회로부터 꾸준히 요구받아 왔지만, 그 요구에 응하는 일에 여전히 미온적이다.
지난달 고용노동부는 <직장 내 괴롭힘 근절 간담회>를 열고 노동시장 약자 보호와 엄정한 법 집행 의지를 피력한 바 있다. 정부가 그토록 강조하는 ‘글로벌 스탠다드’를 따르고, 노동시장 내 약자 보호와 직장 내 괴롭힘 근절 의지의 진정성을 인정받기 위해서라도 한국 정부는 당장 190호 협약의 32번째 비준국이 되어야 할 것이다.
▲ 9월 5일 오전 9시 30분 한국노총 5층 여울리에서 열린 ‘직장내 성희롱·괴롭힘 예방 및 대응 교육’
직장 내 괴롭힘 근절, 정부의 의지와 역할이 중요
190호 협약은 직장 내 괴롭힘이라는 괴물을 방지, 처리, 해결하고 궁극적으로 일터에서 뿌리 뽑기 위해 정부와 사회적 파트너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한국노총은 10월 5일 한국노총 여성위원회, 더불어민주당 이수진 의원(비례), 정의당 이은주 의원과 함께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가 국제노동법으로 효력을 갖는 ILO 190호 협약 비준으로 2천 5백만 노동자, 나아가 모든 국민이 폭력과 괴롭힘의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권리 보장에 나설 것을 촉구했다.
비준을 추진하는 한편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과 관련한 문제점도 함께 개선해 나갈 필요가 있다.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이 근로기준법 내에 신설됨에 따라 5인 미만 사업장 종사자들이 법적 사각지대에 놓이게 된 점,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의 불충분한 규율로 인한 허위신고 제재의 문제 등이 있다. 기자회견에서 김동명 한국노총 위원장이 “직장 내에서 개인의 인격권과 평등권, 건강권 등 광의의 노동인권을 보장받는 일에 예외가 있을 수 없기에 법적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노동자 보호 방안 마련을 위해 정부가 고심해야 한다”고 꼬집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기자회견에 함께 한 국회의원들도 190호 협약 비준을 위해 국회에서 최선을 다할 것을 약속했다. 기자회견을 마친 후 한국노총은 고용노동부에 공식적으로 190호 협약 비준 촉구 서한을 전달했으며, 검토하겠다는 답변을 받았다. 연내 국회의원과 공동으로 토론회도 개최하며, 비준 압박을 이어나갈 계획이다.
직장 내 괴롭힘은 노동자의 건강과 목숨을 위협하는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인권 침해행위이다. 이를 근절하고, 일터에서 인권을 보장하는 것이 다양한 문제 해결의 촉매가 될 수 있다는 당연하지만, 전환적 발상이 필요하다. 직장 내 괴롭힘을 예방하고 조직문화를 혁신하려는 노동자, 사용자의 관심과 의지, 더불어 사각지대와 미비점을 보완하기 위한 정부의 역할까지 맞아떨어질 때 우리는 비로소 안전한 일터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