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일하는 부천시에서도 지난 8월 지방자치단체의 산업재해 예방과 노동자의 안전보건 증진을 위한 책무를 규정한 조례가 만들어졌다. 조례명은 ‘부천시 산업재해 예방과 근로안전보건지원조례’. 경기도를 비롯한 대부분 지자체 관련 조례에 ‘노동안전보건조례’라 이름 붙여진 것을 고려하면 이례적이다.
애초 제안 조례명은 ‘부천시 산업재해 예방과 노동안전보건지원조례’였다. 부천지역 노동계와 부천상공회의소 등 사용자단체, 그리고 부천시와 고용노동지청의 산재예방 담당부서 관계자, 그리고 공인노무사 등 전문가들이 함께 지역노사민정협의회 산업안전위원회에서 조례의 필요성을 토론하고 조례안을 논의해 초안을 마련했다.
관련 조례의 제정을 논의하는 시의회 상임위원회에서는 조례의 기본적 취지와 필요성에는 여야 기초의원 모두 동의했다. 경기도와 안산시·시흥시를 비롯해 주요 경기 기초지자체에서는 이미 지난해 관련 조례가 제정돼 시행 중이다. 이런 실정을 고려하면 부천시도 관련 조례 제정이 다급한 시점이라 순조로울 것이라 예상했다.
그런데 엉뚱한 곳에서 논쟁이 벌어졌다. 관련 조례의 정의 규정에서 ‘노동자’가 맞느냐 ‘근로자’가 맞느냐를 두고 논쟁이 벌어진 것이다. 관련 상임위 국민의힘 시의원들이 조례명의 ‘노동안전보건’이라는 명칭을 문제 삼은 것이다.
△ 출처 = 이미지투데이
관련 상위 법령인 산업안전보건법은 정의 규정에서 적용 대상을 ‘근로자’로 정하고 있다. 헌법과 근로기준법 등 노동관계법에서 ‘근로자’로 정의 규정을 둔 것을 두고 한국노총 등 노동계는 “일제 강점기에 강제노역을 미화하기 위해 사용된 단어인 ‘근로’를 가져와 산업화시기 노동자의 자주성과 주체성을 폄훼하고 수동적·복종적 의미로 사용했다고 비판하며 ‘노동자’로 변경할 것을 요구해 왔다.
일반적으로 노동자의 업무수행과 관련해 발생하는 업무상 재해를 예방하고 일터에서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행위를 이르는 용어인 ‘산업안전’은 그 취지와 달리 사업장에서 산재로 인한 생산성의 훼손 등 기업의 가치에 더 치중한 측면이 있다. 그래서 2018년부터 경기도의회가 전국 최초로 ‘산업재해예방 및 노동안전보건 지원 조례’를 제정하면서 ‘산업안전’이라는 개념 대신 ‘노동안전보건’이라는 개념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노동안전보건의 의미는 산업재해의 발생으로부터 노동자의 생명·안전·건강과 사업주의 잠재적 재산상 손실이 보호되는 상태를 말한다.
이후 서울시를 비롯해 대다수 지자체는 ‘노동안전보건’이라는 개념을 사용해 조례를 마련했고, 고용노동부는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른 지자체의 산재예방 책무 시행을 위한 조례안 가이드라인에 ‘노동안전보건지킴이’ 라는 개념을 사용하기도 했다.
현재 근로기준법의 ‘근로자’ 범위만으로는 노동자의 안전보건을 제대로 증진하기 어렵다. 제도의 대상자이자 보호받아야 할 노동자의 개념은 기술의 발전으로 더욱 넓어지고 있다. 상위법인 산업안전보건법에서 근로자 개념을 확장해 특수고용노동자도 적용하고 있지만 다양한 플랫폼 노동자와 프리랜서, 자영업자를 비롯해 일하는 시민에 대해 일터에서의 안전을 보장하는 일은 기존 상위법의 한계를 벗어나 지자체 의지로 충분히 이행할 수 있다.
이미 다수 지자체는 산재예방과 노동안전보건 지원 조례상의 적용 대상을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에서 “유사형태 종사자와 불완전 고용환경에 있는 자(경기도)” “특수형태 근로종사자(경남도)” “고용 형태를 불문하고 노무를 제공하고 그 대가를 받는 자(성남시)” 심지어 “직업교육훈련 촉진법상 직업교육훈련생이나 출입국관리법상 기술연수생(인천광역시)”까지 확장하고 있다.
국민의힘 의원들은 상위법인 산업안전보건법에 적용 대상이 노동자가 아닌 근로자로 규정된 부분을 들어 부천시만 유독 노동자로 정하는 이유를 따져 묻는가 하면 어떤 의원은 “노동이라는 단어가 좀 세 보인다”라는 이유로 근로라고 명명하자고 주장했다. 결국 ‘노동안전보건지원’ 대신 ‘근로안전보건지원’ 조례라는 해괴한 명칭으로 부천시 최초의 산재예방 지원 조례가 탄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