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이미지투데이>
그냥 쉬고 싶다. 부끄러움도 변명도 없이.
이미 그러고 있지 않냐고 정부와 언론은 말한다. 지난달 통계청은 20대 인구의 수가 전월 대비 감소했고, 사회의 전반적인 고용 지표가 개선되었지만, 취업 활동을 하지 않고 ‘그냥 쉰 청년’의 숫자가 오히려 증가했다고 발표했다. 이들의 숫자는 전월 기준으로 35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20대 인구의 5.8%에 해당하는 숫자다.
이 사회가 청년들이 그냥 쉬었다고 판단하는 기준은 오직 하나다. 구직활동의 여부가 유일한 기준이다. 이 기준에 따르면 회계사 시험을 준비 중인 내 친구 A도 그냥 쉰 청년으로 전락해 버린다.
A는 회계사 시험을 준비하는 동안 자기소개서를 한 번도 쓴 적이 없다. 하지만 A의 삶은 쉬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A는 직장인보다 이른 시간에 독서실로 출근해서, 하루에 10시간 이상 시험공부에 매달린다. 매일 열 시간 이상 구부정한 자세로 공부하느라 A의 몸은 만신창이다. 어느 곳 하나 아프지 않은 곳이 없다.
사회의 기준에 따르면 그냥 쉬고 있는 청년인 A의 삶은 분주하다. 그 누구의 삶보다도.
몇 달 치 일정이 스케줄러에 빼곡히 기록된 다른 친구 B 역시 5.8% 안에 표집이 된 인물 중 하나다. B는 어떤 직장에서도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발견할 수 없었다. 결국, B는 직장을 나와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기로 했다. B는 여러 기관과 단기 프로젝트를 같이 하며 자신의 꿈을 실현해 가고 있다. 운이 좋으면 하나의 프로젝트가 끝나고 곧장 다른 프로젝트에 투입되고는 한다. 하지만 그렇지 못할 때가 더 많다. 어떤 경우에는 몇 달이 지난 뒤에야 새롭게 일할 프로젝트를 찾게 되기도 한다.
통계청에서 그냥 쉬었다는 청년들에 대한 조사가 발표되기 직전까지, B는 몇 달간 참여할 다음 프로젝트를 찾지 못해 마음고생이 심했다. 새 일감을 찾기 위해 B는 정신없이 온갖 곳을 돌아다녔다. 이런 B도 통계청의 기준에 따르면 ‘그냥 쉰 청년’이 된다.
주변에서 그냥 쉬고 있는 청년들을 흔히 볼 수 있다. 통계청이 제시한 20대의 5.8%라는 수치가 허구가 아니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는 듯이 말이다. 이들의 모습은 우리가 그냥 쉬는 젊은 사람에 대해 생각할 때 무심코 떠올리는 은둔형 외톨이와는 완전히 다르다. 모습만 이질적인 것이 아니다. 이들의 삶은 언어적 표현 그대로 ‘그냥 쉬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냥이라는 단어에는 ‘아무런 대가나 조건 또는 의미 없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결국, 그냥 쉬었다는 건 별 뜻 없이 가만히 있었다는 것과 똑같다. 확실히 긍정적인 뜻을 담은 문장처럼 들리지는 않는다. 특히나 ‘빨리빨리’가 몸에 밴 한국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가 세계를 반영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일정 기간 동안 구직활동을 하지 않은 젊은 사람을 굳이 ‘그냥 쉬었다’고 표현하는 것에서 이 사회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 사회가 얼마나 휴식에 관대하지 못한지 같은 것들 말이다. 근현대 사회로 접어들기 전까지 이 땅에서 분주히 일하는 건 하층 계급뿐이었다. 휴식은 오직 양반들의 몫이었다.
휴식이 일종의 특권이었던 셈이다. 갑오개혁으로 우리나라에서 신분제도는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지만, 아직도 이 땅에는 보이지 않는 계급이 존재한다. 보여서는 안 되기 때문에 설계가 더 치밀해진 신 계급사회에서 휴식은 여전히 특권으로 인식되는 듯하다.
은연중에 나보다 아래라고 생각해 왔던 사람이 회사를 그만두고 잠깐 쉬겠다고 하는 말을 들으면 불쑥 이런 생각이 치밀어오른다. ‘네가 뭔데?’ 개인 사정으로 쉰다는 문구를 써 붙여 놓은 가게 앞에서도 우리는 비슷한 감정을 느낀다. ‘아주 배가 부를 대로 불렀구먼? 다시는 안 와야지.’ 일부 청년들을 ‘그냥 쉰다’고 표현할 때도 이와 비슷한 감정일 것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청년들은 눈치가 보여서라도 그냥 쉬지 못한다. 부끄러움을 끌어안은 채, 나중에 이 시간을 어떻게 변명해야 할지 고민하며 쉰다.
정말로 ‘그냥’ 쉴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