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언론에서 노동계를 겨냥하는 또 하나의 보도가 나왔다. 한 여당 의원실에서 대통령·국무총리실과 정부 부처 산하 정부위원회 636개를 전수조사한 결과, 양대노총이 21곳에 참여해 국정 전반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러한 주장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동안 정부위원회에 관련 분야의 전문가가 아닌 노사단체나 시민단체가 참여하는 것에 대해 강력히 문제제기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이러한 비판은 노동계에 주로 집중적으로 쏟아지기 마련이다. 그리고는 전문가들로만 구성된 거버넌스가 중요하다는 주장도 이어져 왔다. 하지만 거꾸로 생각해보면 이러한 비난은 굉장히 일면적이다. 정부위원회는 정치가 마련한 법체계 내에서 행정부가 가진 권한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즉, 노동조합의 정부위원회 참여는 정치 스스로 이것이 필요하다고 규정했기 때문에 가능해진 것이다.
협력적 거버넌스로서의 정부위원회
80년대 후반, 90년대 초반부터 서구권의 공공정책을 다루는 학계 및 정치권에서는 ‘협력적 거버넌스’라는 개념을 많이 사용했다. 신뢰와 파트너십에 토대를 두고 행정부의 통치행위, 조정행위가 이루어지도록 하는 방식으로서 정책의 형성, 결정, 집행에서부터 평가까지 시민사회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민주주의체제의 역사적 형성에 있어 우리보다 훨씬 오래된 역사를 갖고 있는 서구 선진국들이 훨씬 이전부터 이러한 차원의 고민을 했다는 것은 그만큼 한계가 분명하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진국에서는 장관의 의사결정에 도움을 주는 자문기구, 고도의 전문성이 요구되는 정부정책을 결정하기 위한 전문가 기구부터 각종 행정행위에 대한 구제를 위해 운영되는 자문위원회, 지방정부의 특정 계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활용되는 임시적 주민자치기구 등 정부위원회는 훨씬 다양한 형태로, 다양한 수준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 배경 아래 우리나라도 2000년대 이후부터 정부위원회라는 틀을 만들어 행정행위에 대해 보다 폭넓은 의견을 청취하도록 협력적 거버넌스를 제도화하기 시작했다. 정부와 국회는 법 개정 등으로 각종 제도의 운영에 있어 시민사회영역1)의 의견을 본격적으로 청취하기 위해 정부위원회를 명문화했다.
△출처=이미지투데이
전문가들이 더 좋은 대안을 만든다?
혹자는 전문가들로 구성된 정부위원회가 가장 이상적이라고 주장한다. 전문성이 담보되기 때문에 가장 객관적이고 공정한 의사결정을 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과연 그럴까? 작년부터 시작된 국회 연금개혁특별위원회를 보면 이 주장이 사실인지 알 수 있다.
연금특위도 입법부가 주도한 임시적이지만 권위 있는 거버넌스이다. 국민이 선출한 국회의원이 직접 위원으로 참여하며, 이 거버넌스에서 결정된 사안은 바로 여야합의로 법개정절차를 밟는 강력한 권한이 있다. 여야는 특위운영에 있어 전문가들로만 구성된 민간자문위원회를 설치해 전문적인 의사결정을 통해 연금개혁의 안을 만들자고 합의했다. 학계에서 인정하는 권위 있는 전문가들이 모인다면 더 좋은 대안을 만들 수 있으리라 하는 기대가 깔려있었다. 민간자문위원회 위원들에게는 길면 길고 짧으면 짧다는 2달이 조금 넘는 시간이 주어졌다.
결과적으로 민간자문위에는 지금까지 정리된 안을 만들지 못했다. 왜일까? 전문성이라는 잘못된 신화 때문이다. 전문가들이 이해관계에서 자유롭고 학문적인 전문성에 기초해 정책의견을 낼 것이며, 상호토론을 통해 정제된 안을 도출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 자연과학분야에서만 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연금과 같이 정치적인 분야에 있어서는 사실 전문가들이 독립적인 의사결정을 하기 어렵고, 대립 되는 주장들이 난무해 합의되기 어렵다. 게다가 오히려 다수의 조직적 의사결정이 뒷받침을 해주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전문가 개인의 주장이 시간에 따라 쉽게 바뀌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합의되지도 않은 보험료율 15% 같은 이야기가 보도되자, 국민들도 등을 돌리고 있는 상황이다.
시민사회의 대표로서 노동조합
따라서 대다수의 정부위원회에는 시민사회를 대표하는 단체로 노동계와 시민사회단체, 각종 직역단체 등이 참여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이 중에서 노동계는 주로 전국단위를 대표하는 상급단체가 참여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는 포괄적 대표성을 가지면서 동시에 독립적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단체가 참여할 수 있게 하는 조치이다. 개별 사업장 단위나 업종·산업 단위의 노동조합은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롭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정부위원회에서 대표성을 가진 양대노총은 특히 노동계를 대표해 전문성은 다소간 부족할 수 있어도 지속적으로 현장의 의견을 정책적 의견으로 승화시켜 정부에 의견을 제시해 왔다. 그리고 이를 관철시키기 위해 다양한 관련 활동을 해왔다. 특히 보수성향의 정권이 사용자단체나 일부 직능단체 등과 손을 잡고 특혜성 의사결정을 내릴려고 할 때마다 노동계는 시민사회진영과 함께 정부위원회 내부에서 치열하게 싸워왔다.
그렇다면 노동조합이 이와 같이 정부위원회에 참여하도록 규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노동조합에게 부여하는 사회적인 책무일 것이다. 노동조합이 조합원만을 대표하는 과거의 행태에서 벗어나 정부위원회에 참여해 국민 전체의 이익을 고려하도록 하는 사회적 책무성 말이다. 국민연금, 장기요양, 건강보험, 고용보험 등 우리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국민들의 삶에 광범위한 영향력을 미치는 정책 운영에 노동조합의 적극적인 역할을 주문하는 정치권의 무언의 요청인 것이다.
이 글이 출발한 이유가 된 해당 보도에서는 이러한 맥락이 고려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사실관계를 바로잡아야 할 표현들 또한 많이 있었다. 가령 해당 기사에서는 노동 현안과 관련이 없는 위원회에 대한 예로 국민연금기금운용위원회와 장기요양위원회를 들고 있는데, 실제로 이는 분명히 노동 현안과 관련이 깊다. 실제 기금위에서 결정되는 정책들이 주식시장에 영향을 미치고 이는 KOSPI에 상장된 대기업의 노동자들에게 직간접적인 파급효과로 이어진다. 장기요양위원회에서 매년 결정하는 수가 및 보험료율, 그리고 관련 제도개선 조치들은 장기요양영역에서 일하는 종사자에게뿐만 아니라 노동자 본인의 경제적 부담, 그리고 부양가족에 대한 돌봄 부담에 대해 파급효과가 있다.
사회가 빠르게 복잡해지고 있는 만큼 노동이 참여해야 할 정책영역도 보다 넓어지고 있는 추세이다. 노동조합이 이러한 정세 속에서 정부위원회에서 해야 할 역할이 있다. 일차적으로는 보다 더 전문성을 함양해 견고한 정책적 의견을 제시하고, 전선을 만들어내는 ‘울타리’ 역할일 것이다. 다음으로는 더욱 기민하게 움직여 시민사회단체가 함께 폭넓게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바구니’ 역할일 것이다. 한국노총이, 노동계가 더 많은 내부자원을 활용해 더 많은 활동을 수립·시행해야 하고, 더 많은 연대로 노동시민사회진영의 확대된 전선을 만드는 것이 필요한 시점이다.
<미주>
1) 시민사회영역은 우리가 말하는 시민사회단체만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권인 정부와 국회, 그리고 시장을 제외한 영역을 총체적으로 지칭하는 단어이다. 여기서는 노동조합이나 시민단체, 전문가단체 및 지역의 사회적 네트워크 등 다양한 영역을 포괄하는 의미로 사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