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일부터 7일까지 일주일간은 양성평등기본법에서 정하고 있는 양성평등주간이다. 남성과 여성의 조화로운 발전을 통해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일·가정 양립 실천을 통한 실질적인 남녀평등의 이념을 구현하기 제정되었다고 한다. 양성평등주간 제정의 의의를 기념하며 올해 한국노총은 9월 5일 양성평등주간 기념「여성노동포럼」을 개최했다. 여성노동자가 직면한 노동현실과 새 정부의 여성노동정책을 톺아보고, 한계와 과제를 도출하는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124년 전 여권통문, 그리고 오늘의 현실
1898년 9월 1일, 여성이란 이유로 제대로 교육받을 수도 직업을 가질 수도 정치에 참여할 수도 없었던 시대에 여성인권선언문, <여권통문>의 발표는 그야말로 ‘충격’적인 사건이었을 것이다. 미국의 여성노동자들이 생존권과 참정권을 요구하며 거리로 나섰던 ‘세계여성의 날’보다 무려 10년을 앞서는 사건이었으니 당연히 그랬을 것이다. 이렇게 우리나라 여성운동사, 아니 역사에 획기적인 한 획을 그었던 그 날을 우리는 양성평등주간으로 지정해 기념해오고 있다.
그 날 선배 여성들의 용기 있는 외침은 124년 동안 다양한 분야의 여권신장으로 이어져 오늘날 여성이 교육을 받고, 직업을 갖고, 정치에 참여하는 일은 당연한 일이 되었다. 그러나 실질적인 양성평등을 이루었는가에 대한 물음에는 여전히 고개를 가로저을 수밖에 없다. 여성들의 교육수준은 남성의 그것과 다르지 않지만 같은 학위, 스펙을 가지고도 입직하는 순간부터 성차별을 당하고, 어렵게 들어온 직장에서도 결혼, 임신, 출산, 육아로 인해 차별 받기 일쑤이다. 그 결과 경력이 단절된 여성은 성별 임금격차라는 또 다른 차별에 맞닥뜨리게 된다.
안타깝지만 이것이 여권통문이 발표된 이후 강산이 열두 번도 더 지난 오늘날의 현실이다. 문득 오늘날 우리 여성의 현실이 124년 전 선배 여성들의 눈에는 어떻게 비쳐질 지 궁금해진다.
△ ‘양성평등주간’ 기념 여성노동포럼
여전한 구조적 성불평등, 그러나 인정하지 않는 정부
실질적 양성평등이 얼마나 요원한 일이면, 기념주간을 법으로까지 명시하는 것일까? 여성에 대한 구조적 차별이 없는 사회라면서 정말 ‘넌센스’가 아닐 수 없다. 포럼에 참여한 학자와 전문가들은 우리 사회에 구조적으로 존재하는 성불평등을 현 정부가 인정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제는 설명해야 하는 개념이 되었으며, 여성노동 문제가 정치, 경제, 문화, 가족이 연결된 구조 속에서 발생하고 있기 때문에 해결도 구조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꼬집었다.
그러나 구조적 성불평등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는 현 정부에서 여성과 성평등 관련 사업 및 정책은 자취를 감추고 있다. 여성가족부 폐지를 추진하고 있는 정부는 그 동안 여가부가 주최해 왔던 양성평등주간 기념식을 올해 영상으로 간단하게 대신했다. 여가부가 발표하는 보고서인 ‘통계로 보는 여성의 삶’은 ‘통계로 보는 남녀의 삶’으로 제목까지 바꿔 달았다.
지난 5월 발표한 110대 국정과제에도 양성평등일자리 구현을 위해 육아휴직 등 일가정 양립지원, 성별근로공시제 등의 과제가 포함되었을 뿐이다. 성불평등 구조 속에서 성별임금격차, 여성노동 저평가 등 노동시장의 차별을 적극적으로 해결할 정책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그 동안 여가부에서 수행했던 정책들을 최소화하고, 관련 제도와 정책에서 ‘여성’이란 단어를 지우기에 급급한 형국이다. 전문가들이 지적한대로 정부가 구조적 성불평등의 존재를 부정하는데 온 힘을 쏟고 있으니 앞으로 5년간 여성노동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는 존재하지만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되지는 않을지 심각히 우려된다.
성평등 사회가 불가능한 이상이 되지 않으려면
세계 10대 경제 강국 한국의 구조적 성불평등을 말해주는 지표가 있다. 세계경제포럼에서 각국의 성평등 수준을 비교·발표하는 성격차지수(Gender Gap Index)에 따르면 2022년 한국의 순위는 146개국 가운데 99위다. 경제, 정치, 교육, 노동 등 다양한 영역에서 여성은 불평등을 경험하고 있지만, 특히 경제참여와 기회의 영역 순위는 116위에 달한다. 노동의 영역으로 한정하자면 낮은 고용률, 성별 직종분리, 성별 임금격차, 돌봄 부담, 일터에서의 성희롱·성폭력 등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여성노동포럼>에서 발제를 맡은 중앙대 사회학과 김경희 교수는 “성별임금격차, 여성 경력단절, 사회적인 돌봄, 젠더폭력, 성차별 문화·의식 등의 문제에 구조적으로 접근하고 방안을 마련할 수 있는 추진체계가 필요하다”며, “출산, 보육, 인권(폭력) 이슈를 여성인력활용이나 성역할을 전제로 하는 도구적이고 몰성적인(gender blind) 정책 프레임에서 벗어나 불평등한 노동시장과 젠더관계 개혁이 있어야 한국사회의 지속가능성과 사회통합을 이룰 수 있다”고 역설했다.
얼마 전 영국 BBC는 한국의 세계 최저 출산율을 보도하며 ‘우리는 출산 파업 중’이라는 한 여성의 인터뷰를 전했다. 능력 있는 여성들에게 사회가 나서서 구조적 성평등을 만들어주지 않으면 여성들의 파업은 출산에만 그치지 않을 것이다. 노동시장에서, 가정에서, 사회 전반에서 여성들의 파업이 일어나지 않도록 정부는 존재하는 구조적 성불평등을 인정하고, 당장 여성노동정책의 방향부터 잡아야 한다. 외면하는 동안 구조적 성불평등은 깊어지고, 성평등한 사회는 이상 속에 머물게 될 것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