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지혜 한국노총 대외협력본부 부장
제주 4.3의 의미를 돌아보고, 평화의 통일의 길을 모색하기 위한 제10회 한국노총 평화학교가 4월 19일부터 21일까지 제주도에서 진행되었다. 코로나 대유행과 사회적 거리두기 등으로 중단되었다가 2년 만에 재개 된 이번 평화학교에는 한국노총 산하 노조간부 및 조합원 40여명이 참석했다. 이번 평화학교는 4.3 강연을 시작으로 4.3 평화공원을 방문해 추모하고, 4.3 유적지를 탐방했다. 2박 3일간 푸르른 바다와 검은 섬 오름, 초록이 물든 대지와 붉은 동백꽃의 아름다운 풍광에 서린 제주4.3의 혹독한 역사를 마주하게 되었다. 분단과 전쟁 그리고 냉전 속에 희생되어 온 제주의 74년 역사와 4.3희생자, 유가족들의 숭고한 희생에 머리를 숙였다.
관덕정, 1947년 3.1 발포사건의 현장
조선시대 관아 건물의 하나인 관덕정은 제주 행정 중심지에 위치해 있다. 1945년 8월 해방과 동시에 일본군이 물러가고 미군정이 들어와 제주 관덕정 바로 옆에 미군정청이 설치되었다. 1947년 3월 1일 관덕정에서 제28주년 3.1절 기념 제주도대회가 열렸고, 3.1절 행사가 끝나자 군중들은 가두시위에 나섰다. 가두시위 중 기마경찰의 말발굽에 어린아이가 치여 다쳤다. 이때 기마경찰이 다친 어린이를 그대로 두고 지나가자 흥분한 군중들이 돌을 던지며 항의했고 무장경찰은 이에 대응하여 총격을 가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민간인 6명이 사망했다. 미군정은 제주도를 경찰의 발포를 정당방위로 주장하고, ‘빨갱이 섬’으로 몰아갔다. 본토에서 응원경찰이 대거 파견됐고, 극우청년단체인 서북청년회(서청) 단원들이 속속 제주에 들어와 빨갱이 사냥이라는 구실 하에 제주도민을 탄압했다.
한라산 기슭 오름마다, 1948년 4월 3일 봉기
당시 한반도는 분단의 위기에 봉착하고 있었다. 1948년 단독 선거안이 명백해지자 남한 내 많은 정당과 단체에서 잇따라 반대 성명을 발표하며 격렬하게 반발했다. 남조선노동당(약칭 : 남로당) 제주도당은 이반된 민심과 5.10 단독선거 반대투쟁을 결합해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선·단정 반대를 기치로 무장봉기를 일으키게 된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한라산 기슭 오름마다 봉화가 붉게 타오르면서 남로당 제주도위원회가 주도한 무장봉기가 시작되었다. 350명의 무장대는 12개 경찰지서와 서북청년회 등 우익단체 단원의 집을 지목해 습격했다.
오라리 마을, 평화협상과 미군정
나무가 자라지 않고 수풀만 무성했다는 민오름 아래 오라리 마을이 있다. 5.10 총선거를 앞두고 이곳에서 미군정과 무장대와의 평화협상이 성사되었다. 그러나 평화협상 직후 방화사건이 발생, 협상이 파기되는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했다. 이 방화는 우익 청년들이 저질렀지만, 미군정과 경찰은 ‘폭도들이 한 행위’로 조작했고, 무력 진압 방침 결정으로 이어진다.
불타는 중산간 마을, 초토화 작전
무장대는 5.10 단독선거에 대한 적극적인 거부 투쟁을 전개했다. 전국 200개 선거구 중 제주도 2개 선거구만이 투표수의 과반수 미달로 무효 처리되었다. 5.10 선거 거부는 미군정에 대한 심각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져, 제주도민들에 대한 대 탄압이 예견되었다. 마침내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했다. 이승만 정부는 본토의 군 병력을 제주에 증파했다.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해안선으로부터 5㎞ 이상 들어간 중산간 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배로 간주하여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이 발표되었다. 이때부터 토벌대는 중산간 마을에 불을 지르고 주민들을 집단으로 살생하기 시작했다.
아이고 소리도 못냈다, 북촌 너븐숭이 기념관
북촌리는 함덕 해변 옆 해안마을이다. 이 지역에서는 세계사적으로도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단일사건으로는 가장 많은 448명(2021년 기준)이 희생됐다. 당시 희생된 임시 매장된 어린아이들의 무덤 20여 기가 그대로 남아 있는데, 이곳은 ‘애기무덤’으로 불리고 있다. 애기무덤 앞 놓여 진 동백꽃, 노란 바람개비와 장난감을 보니 애달픈 마음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위령제도 마음대로 지내지 못한 침묵 속에 한날한시 동네에 가득한 기름 냄새로 제삿날임을 알았다고 한다.
곤을동, 잃어버린 마을
물이 귀한 제주 섬에서 항상 물이 고여 있는 땅이라는 데서 그 이름이 붙여진 곤을 마을. 소박하고 평화롭던 마을 들이닥친 군은 모든 가구를 불태우고 24명을 집단 학살했다. 아직까지 폐허가 된 터에 양옥집 한 채만이 덩그러니 서 있다. 토벌대는 무장대와 민중의 연계를 막기 위해 중산간 마을 주민들을 해안마을로 강제 소개시키고, 100여 곳의 중산간 마을을 불태웠다. 당시 중산간 마을 95%가 잿더미가 되었다. 곤을동도 그렇게 사라진 마을 중에 하나이다.
검은 섬 위 뚝뚝 떨어진 동백꽃 사이를 걸으며
한겨울 눈밭이 만개한 상태에서 어느 날 툭! 통꽃으로 지는 꽃인 동백은 희생당한 제주도민을 상징한다. 4.3사건 전 기간 동안의 희생자 수는 2만 5,000∼3만여 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당시 제주도 인구의 10분의 1 이상이 목숨을 잃은 것이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또 다시 제주에 비극이 찾아왔다. 1950년 제주도내 예비 검속된 대부분은 집단적으로 수장되거나 총살·암매장되었다. 전국 각지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4.3사건 관련자들도 즉결처분 되었다. 1957년 4월 2일 최후의 무장대원이 생포되면서 7년 7개월 만에 4.3은 종식되었다.
제주4.3평화기념관 백비 앞, 4.3의 정명을 위해
이토록 참혹한 제주 4.3은 오랜 시간 동안 말하면 안 되는 단어였다. 오랜 금기를 깬 것은 1987년 6월 항쟁의 민주화 열기에서 시작된다. 4.3을 드디어 말하기 시작했고, 2000년에 4,3특별법이 제정 공포되고, 2003년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공식적으로 사과했다. 2014년 박근혜 정부는 4월 3일을 국가지정추념일로 결정했다. 2021년 2월 제주4.3특별법 전부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해 제주 4.3의 완전한 해결을 위한 주춧돌이 마련되었다. 올해 열린 제74주년 제주 4.3 희생자 추념식에는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참석해 희생자를 추모하고 유가족을 위로했다. 이제는 진상규명과 명예 회복, 배․보상 기준 마련 등 특별법 개정의 후속 조치들이 차질 없이 이뤄지도록 전 국민의 깊은 관심이 필요하다.
제주4.3평화기념관 입구에는 백비가 놓여 있다. 백비(白碑)는 어떤 까닭이 있어 글을 새기지 못한 비석을 일컫는다. 제주 사람들은 고립된 작은 섬에서 세계 냉전 구도가 빚어낸 엄청난 희생을 강요당했다. 사건 이후에도 연좌제와 국가보안법, 레드컴플렉스 등으로 정신적 상처는 계속되었다. 여전히 ‘봉기, 항쟁, 폭동, 사태, 사건’ 등으로 다양하게 불려온 제주 4.3은 아직까지도 올바른 역사의 이름을 얻지 못하고 있다. 제주 4.3이 이루고자 했던 것은 분단반대, 전쟁반대였으며 아직 백비에 글을 새기지 못한 이유도 여전히 우리 땅이 분단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난한 삶 속에서도 진실과 희망의 줄기를 한시도 놓지 않았던 제주를 보며, 역사를 기억하고 미래를 만들어 가야 하는 이 땅 노동자에게 지워진 평화와 통일의 책무도 다시 상기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