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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해방 후 주택문제와 ‘적산요정’ 개방운동

남찬섭 동아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등록일 2021년05월24일 08시31분 트위터로 보내기 네이버 밴드 공유

해방된 지 한 달이 조금 안된 1945년 9월 9일 서울에 들어온 미군은 조선총독부 건물의 일장기를 내리고 그 자리에 태극기가 아니라 성조기를 게양하면서 군사통치를 시작하였다. 이렇게 거의 3년에 걸쳐 시작된 미군정기간 동안 사회복지정책은 구호정책으로 불렸고 그 대상은 주로 전재민이었다. 전재민은 일제강점기에 징병・징용・이민 등으로 해외에 나갔다가 해방을 맞아 돌아온 귀환 동포를 가리키는 말로 200만명 이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과 만주에서 온 전재민이 가장 많았지만 이들은 그곳에서 이룬 재산을 가지고 오지 못한 경우가 많아 귀국 후 실업과 빈곤 문제로 고통받았고 주택문제도 큰 고통의 원인이었다. 일제강점기에도 차별적인 주택정책으로 조선인들은 주택문제가 심각했는데 전재민들이 귀환하면서 문제는 더 악화되었다. 1945년 겨울에는 용산 다리 밑에서 전재민이 얼어 죽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하지만 미군정 당국의 주택정책은 실패의 연속이었다. 당시 남한의 사회단체들은 적산가옥만이라도 공평하게 배분하면 주택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미군정 당국은 적산가옥 처리에 소극적이었다. 그 사이에 모리배(謀利輩)들이 발호하여 해방 전에 이미 일본인으로부터 주택을 넘겨받았다는 거짓서류를 만들거나 친척들의 명의를 동원하여 여러 채의 적산가옥을 등기하는 등 적산가옥 쟁탈전을 벌였다. 이로써 적산가옥을 공평하게 배분하여 주택문제를 민족적으로 그리고 구조적으로 해결할 가능성이 미군정 스스로에 의해 차단되어 버렸다. 미군정의 주택정책은 주택문제의 구조적인 해결책을 닫아놓은 상태에서 추진되었는데 이것도 미군정의 정책실패로 인해 초래된 물가 폭등으로 지지부진하였다. 미군정은 해방 전까지 극도의 통제상태에 있었던 쌀 등의 생필품에 대해 아무런 대안도 없이 갑작스럽게 자유거래 조치를 취함으로써 모리배들의 발호를 허용하였고 이로써 해방 후 2개월 가량 그런대로 크게 오르지 않았던 물가가 폭등하게 되었다.

 


사진 : 적산가옥(출처 : 문화재청)

 

이처럼 미군정의 어리석기 짝이 없는 자유화 조치로 물가가 폭등하자 건설자재 값도 폭등하여 주택건설에 커다란 지장을 초래하였다. 미군정은 해방 이듬해인 1946년이 되어서야 주택대책을 수립하기 시작했는데 1946년 2월에 주택대책위원회를 설치하고 4월에 2천만원의 예산으로 주택 3만호를 건설하는 계획을 발표하였다. 하지만 물가가 너무 빨리 올라 이 계획은 제대로 이행되지 못했다. 이러는 가운데 해방 1주년을 맞는 1946년 8월에는 남한의 정당과 사회단체들이 겨울이 오기 전에 빨리 임시주택이라도 지어야 한다는 건의를 하게 된다. 하지만 임시주택 건설도 제대로 추진되지 못하여 전재동포구호회(위원장 조소앙)는 10월에 기자회견을 열어 주택문제 해결을 촉구하기도 했다. 이즈음에 한 미군장교가 가주택을 고안했는데 미군정은 가주택에 대한 비판을 무릅쓰고 11월에 7만 3천호 건설을 목표로 가주택 건설에 본격 나섰다. 그러나 미군정 당국이 가주택 1동의 건축비를 2,750원으로 잡아 입찰공고를 냈지만 최저입찰가가 5천원을 초과하는 등 가주택 건설도 지지부진하였다.

 

이렇게 되자 남한의 사회단체와 정당들은 전재민 보호를 위해 겨울 동안만이라도 적산요정을 개방하자고 요구하기 시작하였다. 적산요정은 일제강점기에는 당연히 적개심의 대상이었지만 해방 후에도 미군정 고위관료들과 그들을 뒷배 삼은 친일모리배들이 드나들어 적개심의 표적이었으므로 그 개방안은 여론의 상당한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미군정 당국은 적산요정을 전재민에게 개방하면 나중에 못쓰게 된다면서 개방을 거부하였다. 이에 대한 비난여론이 들끓자 결국 명동과 회현동 일대의 13개 적산요정을 개방하여 전재고아 등 전재민 2,460명을 12월 23일에 입주시키기로 결정하였다.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개방이 결정된 13개 적산요정이 종업원들을 부추겨 요정개방에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요정 종업원들은 ‘요정 개방의 취지에는 동의하지만 방법이 틀렸다’면서 ‘우리는 목숨을 바쳐서라도 우리의 생활을 위해 끝까지 싸우겠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1946년 12월 23일에 해방조선에서 가장 비극적인 일이 발생하게 된다. 이날 아침 일찍 전재민들은 할당된 적산요정으로 갔지만 종업원들의 저항에 가로막혀 결국 입주하지 못했고 그러는 사이 동일자혜원의 두 살 된 한 고아는 추운 날씨에 바깥에 너무 오래 서 있어서 그랬는지 급성폐렴 돌발로 사망했다. 적산요정 개방을 둘러싸고 종업원들은 생존권을 건 투쟁을 벌였고 두 살 된 전재고아는 실제로 목숨을 잃었으니 해방조선에서 주택문제를 둘러싼 갈등은 실로 ‘목숨을 건 투쟁’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미군정 당국은 적산요정 개방을 연기해버렸고, 이에 따라 요정에서는 영업재개광고를 써 붙이는 등 다시 활기를 띠게 되었고 전재민들은 또 다시 울면서 다리 밑과 거리를 돌며 추위에 떨게 되었다.

 

적산요정 개방 연기 후 다시 여론이 나빠지면서 미군정은 1947년 1월에 요정 개방을 결정하였는데, 이때 개방된 요정은 7개였고 수용인원은 778명으로 크게 줄어들었다. 그리고 개방이 결정된 요정도 당초 13개 요정 중 규모가 크고 고급인 이른 바 ‘갑종’ 요정은 모두 빠져나가고 ‘을’종 요정으로 채워졌다. 이렇게 하여 1차 요정개방은 당초 계획보다 크게 축소된 채 끝났다. 하지만 이것으로 전재민들의 주거문제가 해결되지 못하면서 2차 요정개방이 추진되었는데 이번에는 중국인 요정 주인들은 찬성한 반면 조선인 주인들이 반대하고 나섰다. 그러다가 겨울이 다 지난 1946년 3월이 되어서야 4개 요정과 서룡사, 이견여관을 개방하여 770여명을 수용하였다. 그 후 중국인이 운영하는 요정개방이 시도되다가 중단되면서 1차와 2차에 걸친 적산요정개방운동은 막을 내렸다.

 

가주택건설로부터 적산요정 개방운동까지 이어진 흐름은 시기적으로는 9월 총파업과 10월 대구인민항쟁이 전개되었다가 잦아들어가는 시기와 중복되며 정책적으로는 적산가옥 처리의 왜곡과 물가정책의 실패를 배경으로 한 것이다. 즉 적산의 민족적 처리를 외면한 미군정은 주택문제 해결의 구조적 접근을 스스로 차단하였으며 물가정책실패는 주택건설의 실패를 초래하였다. 적산요정 개방운동은 이러한 배경에서 나온 것이고 여론의 지지를 받았으나 여전히 미군정에 의한 왜곡된 적산처리와 그에 편승한 요정주인 등 친일모리배들의 저항을 넘지 못했다. 해방조선에서 나타났던 적산가옥 쟁탈전은 오늘날 부동산 투기로 재연되고 있다. 적산가옥 쟁탈전의 한 정점이라 할 수 있는 적산요정은 어쩌면 오늘날의 엘시티요 오늘날의 내곡동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남찬섭(교수)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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