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노총 조직확대본부 송명진 실장 (한국노총 ‘세계노동운동사’ 읽기모임 회원)
지난해부터 한국노총 사무총국과 산별의 활동가들이 모여 세계노동사 세미나를 진행하고 있다. 여건상 요약발제와 짧은 토론 위주로 진행하고 모자란 부분은 저자인 김금수 선생님의 특강으로 채우고 있다. 일부 활동가의 학습으로 그치지 않고 더 많은 노조 간부·조합원들과 공유하면 좋지 않겠냐는 제안이 있어 올해부터 노총 기관지에 세계노동운동사에 대한 글을 연재하기로 했다. 세미나 참가자들이 나누어 원고를 쓰되 책을 단순히 요약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노동 이슈와 연관된 과거의 역사적 경험을 살피고 교훈을 찾는 방향으로 글을 구성하고자 한다. 부족한 점이 많을 것이나, 각급 조직에서 운동사에 대한 학습과 노동운동의 역할과 과제에 대한 논의가 조금이라도 늘어가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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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와 조우한 한국사회는 재난지원금의 지급범위부터 집합금지 업종의 선정기준까지 공정과 정의의 가치를 어떻게 구현할 것이냐는 수많은 물음을 마주하고 있다. 이미 구조조정이 시작된 노동시장에서 사회적 보호 대상의 우선순위에 대한 논쟁 역시 거세질 것이며, 코로나 이후의 경제‧사회정책의 원칙과 방향에 대한 논의도 본격화될 것이다.
노동운동이 각각의 질문에 구체적 해법을 제시하며 사회발전을 선도하기 위해서는 먼저 가치판단의 기준부터 보다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일하는 사람들의 보편적 이익에 기반한다는 원론적 원칙만으론 수많은 이해관계들이 복잡하게 얽히고 때론 매섭게 충돌하는 현실 앞에 무력해지기 쉽기 때문이다. 노동자 일반의 단일한 이해관계가 분명한 사안도 있지만, 고용형태와 기업규모, 종사상 지위, 성별과 연령, 국적 등 다양한 분계선에 따라 관점과 입장이 천양지차인 이슈도 많다.
노동계급이 하나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다수의 집단으로 분화되었다는 주장은 이미 새롭지 않다. 런던대 노동경제학 교수이자 ILO에서 오랫동안 노동문제를 실증적으로 연구한 가이 스탠딩은 2011년 ‘프레카리아트(Precariat)’라는 저서를 통해 새로운 노동자 집단이 파편화된 노동계급의 한 축으로 형성 중이라 말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노동조합을 통해 고용안정과 사회보험 보장을 사회적 권리로 획득했던 프롤레타리아와 다르게 신자유주의 시대 들어 모든 게 불안정해진 노동자 계층이 빠르게 확대되고 있다는 것이다. 책에서 한국은 그 속도가 가장 높은 국가로 소개되고 있다. 그러고 보면 프레카리아트는 우리가 흔히 써온 ‘비정규직’, ‘불안정노동’, ‘주변부 노동’, ‘취약노동’이란 표현이 가리키는 동일한 대상의 다른 이름이다.
노동조합이 새로운 유형의 노동자에게 효과적인 이해대변 수단이 되지 못한다는 지적도 흔하다. 노조운동이 기본적으로 기존 조합원의 이해관계에 충실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노동자로서의 정체성도 빈약하고 분산된 상태에서 임시적으로 노동을 수행하는 이들에게 노동조합이라는 제도적 형식 자체가 문턱이 높게 여겨진다는 것이다.
이렇듯 노동자 집단 내부의 정체성 분화가 커지고 기존 조직적 틀로 포괄하지 못하는 대상이 늘어난다면 노동조합운동의 대표성과 사회적 영향력은 축소될 수밖에 없고 기업이나 산업, 또는 지역차원으로 구축되었던 노동조합의 힘 또한 유지되기 어려울 것이다.
국가들의 흥망성쇠처럼 사회운동의 정체와 쇠퇴도 당연하다. 인류의 지난 역사에서 그와 같은 사례는 차고 넘칠 것이다. 노동운동사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산업혁명과 함께 경제사회구조의 변화와 산업노동자계급의 형성이 이루어진 19세기 영국에서의 동업조합의 쇠락이 대표적일 것이다.
동업조합은 중세시대의 상인과 수공업자의 길드로부터 유래한 것으로 도제제도의 바탕위에서 동종 직업의 생산자들이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을 보호하고 상부상조를 도모하기 위해 만든 조직형태이다. 도제제도는 일종의 수공업기술자 양성시스템으로써, 수습노동자에 해당하는 도제가 수년간의 훈련기간을 마쳐야 독립기술자인 직인이 될 수 있고, 걸작품을 만들 수 있는 직인은 장인신분으로 상승하여 스스로 작업장을 만들고 도제를 채용할 수 있는 구조였다. 이들 단체는 결사체의 힘을 통해 지역 내 특정 산업의 거래를 독점하고 생산자들끼리 경쟁을 규제함으로써 회원들의 이익을 배타적으로 추구하였고, 각 도시에서 상당한 정치적 영향력도 획득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확대되면서 동업조합의 지위는 위협받을 수밖에 없었다. 수공업자가 일정 규모의 작업장을 갖추고 다수의 직인과 도제를 고용해 작업을 행하는 방식인 매뉴팩처나 자본가가 수공업 생산자들에게 원료나 도구를 제공해 상품을 생산하는 선대제도가 확산되면서, 장인은 고용주나 중간관리자로, 직인과 도제들은 임금노동자로 빠르게 전환되었다. 1812~14년 도제제도 규제가 폐지된 후로도 런던의 제화나 양복제조 직종 장인들은 파업 등의 직접 행동을 통해 그들의 지위를 지키고자 노력하기도 하였으나 여성과 아동을 포함한 미숙련노동자들이 대거 노동시장에 유입되는 것을 막을 순 없었다. 그 과정에서 동업조합은 “특유의 배타성과 직업적 폐쇄성”으로 인해 “역사의 유물”로 전락했다.
쇠퇴한 동업조합을 대신해 노동자 대표 조직형태로 부상한 것은 노동조합이었다. 초기 노동조합은 주로 상호부조를 통한 구제 활동이 위주가 된 공제조합의 성격을 가지면서도 이전에 즉흥적‧산발적으로 발생했던 노동자들의 파업을 조정‧지도하는 지도부로서의 기능을 수행했다. 단결금지법과 같은 국가의 탄압 하에서도 비합법활동을 끊임없이 전개해 1824년 노조활동의 권리를 쟁취했으며, 1850년대 경제위기로 인한 노동조건 악화에 맞서 노동시간 단축과 적정임금 쟁취를 위한 투쟁을 전개했다.
그러나 19C 중반이후까지도 영국의 노동조합은 여전히 숙련공 위주의 폐쇄적 직능 노조로서의 성격이 강했고, 노조 지도자들은 노조활동의 제도화에 안주해 차츰 관료화되었다. 1880년대 들어 세계자본주의의 경쟁이 강화되고 기계도입이 보다 확대되면서 숙련노동자의 지위가 흔들리자 비숙련노동자들이 중심이 된 ‘신노동조합운동’이 대두되었다. 신노동조합은 직업별노조를 넘어 다양한 직종을 포괄하는 일반노조 방식을 채택하고 전투적 운동을 전개함으로써 기존 노동조합운동과 차별화된 노선을 추구했다.
19세기 영국 노동운동의 역사는 불변의 지위가 계속되는 사회운동은 없으며, 노동조합운동 역시 끊임없이 노동시장에 등장하는 새로운 집단을 포괄하고 그들의 대중적 역량에 기반한 조직으로 성장하기 위해 노력해왔음을 보여준다.
이제 다시 현실의 문제로 돌아오자. 21세기 노동계급의 분화와 노동조합운동의 침체는 불가피한가? 음울한 전망을 거부하는 목소리도 뚜렷하다. 이미 오래전부터 세계 여러나라의 노동운동은 노동조합 재활성화 전략을 추구하며 위기를 타개하고자 노력하고도 있다. 아직은 온전히 극복되지 못한 채 디지털기술의 급속한 발전부터 오늘의 코로나 사태에 이르기까지 여러상황들과 맞물려 더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지만, 그 방향은 결코 확정적이지 않다.
다만 지난 노동운동사를 통해 짐작할 수 있는 것은, 현재 노동조합운동의 주체들이 불안정노동을 포괄하는 노동운동의 연대와 공동투쟁을 강화해 21세기 노동자계급의 정체성을 형성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면, 자본주의의 모순과 불합리가 존재하는 한 새로운 주체들이 주도하는 새로운 노동운동의 물결이 기존의 조직과 질서를 낡은 유산으로 규정하며 역사의 한켠으로 밀어낼 것이라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