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현 한국노총 교육선전본부 실장
“이 자리에서 벌어지고 있는 여러 가지 말씀에 대해서 대단히 무겁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기업의 사회적인 책임을 다할 수 있도록 진일보된 노력을 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가습기 살균제로 인해서 고통 받고 계시는 피해자분들과 가족 분들께 진심어린 사과를 드립니다.”
최창원 전 SK케미칼 대표이사는 2019 가습기 살균제 청문회에서 이렇게 말하고 머리를 조아렸다. 채동석 애경산업 대표이사 부회장 역시 사과의 뜻을 밝히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기업 대표들은 구체적인 보상 계획을 제시하라거나, 증거인멸을 하려했다는 의혹에 대해서는 입을 닫았다. 이를 지켜보던 피해자들은 “믿을 수 없다”거나 “거짓말”이라며 야유를 쏟아냈다.
나는 다른 이유로 이들의 사과가 거짓이라 생각한다.
지난 8월 22일 경총은 ‘화학물질 규제 개선 건의 과제’를 정부에 제출했다. 경총은 이 건의 과제를 제출하면서 “화학물질 규제 법률이 기업경쟁력을 저하시키고, 일본 수출규제의 영향에 따라 어려움이 더욱 증가할 것”이라고 이유를 밝혔다. 7월에 열린 문재인 대통령과 30대 기업총수들과의 간담회에서도, 역시 7월에 열린 환경부와 중소기업중앙회의 ‘중소기업환경정책협의회’에서도 사측 대표자들은 “신규 화학물질 생산에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며 관련 규제 완화를 요구했다.
이들이 완화를 요구하고 있는 법률은 구체적으로 화평법(화학물질의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과 화관법(화학물질관리법), 산안법(산업안전보건법)이다. 화평법은 신규화학물질 또는 연간 1톤 이상 제조 수입되는 기존 화학물질의 용도와 양, 유해성 등의 자료를 환경부장관에 보고할 의무를 규정한 것이다. 화관법은 인체에 유해한 화학물질 유출 사고를 내면 해당 사업장 매출의 최대 5%에 이르는 과징금을 부과할 수 있도록 한 법이다. 이 법들은 구미 불산 유출사고와 가습기 살균제 피해 등 화학물질에 의한 대형 참사 후 만들어지거나 개정된 대표적 법안이다. 환경부 집계에 따르면 가습기 살균제로 인해 지난 8월 9일까지 6,505명이 피해를 당했고 그 중 1,424명이 죽었다. 다시 말해 이 법들은 수많은 사람의 목숨 값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일본 수출규제를 빌미로 기업의 이윤에 방해가 되는 이러저런 규제를 풀어달라고 오늘도 아우성이다. 앞에서는 사과의 고개를 숙이며, 뒤로는 화학규제완화를 대통령에게, 정부에, 국회의원들에게 요구한다. 과연 몰염치의 끝판왕이라 할만하다.
가습기 살균제 외에도 유해화학물질에 의한 노동자들의 피해는 수도 없다. 수은중독으로 17살에 사망한 문송면, 삼성반도체공장에서 백혈병을 얻고 죽어간 황유미와 노동자들, 휴대폰 부품을 세척하다 시력을 잃은 전정훈과 파견노동자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발암물질, 생식독성물질, 유전자변이원성물질 등 수많은 유해화학물질에 노출되어 있음에도 자신의 노출 사실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노동자들이 허다하다.
노동자들은 일자리도 잃었다. 가습기 살균제를 제조·판매한 업체 중 하나였던 옥시레킷벤키저는 가습기살균제 피해를 고스란히 노동자들에게 전가했다. 불매운동이 일어나자 수차례의 희망퇴직을 실시하여 250명이었던 직원 규모를 41명으로 줄이고, 결국 공장을 폐쇄해 남은 노동자들은 정리해고했다. 이 노동자들도 분명한 피해자지만 이들은 ‘옥시’라는 이름만 들어도 욕하고 흥분하는 사람들 앞에서도 그저 소리 없이 울음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연탄 나르고, 도배해주고, 불우이웃 돕는 것이 아니다. 법과 윤리를 준수하고, 이윤을 추구함에 있어 사람과 환경에 대한 관심을 우선 고려하는 것이 기업의 사회적 책임의 핵심이다. 그걸 제대로 알았다면 앞에서는 사회적 책임을 다하겠다고 하면서, 관련규제를 없애달라는 이중적 태도는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사과는 거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