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레미 리프킨이 <The End of Work>이란 책을 낸 게 1994년, 번역되어 <노동의 종말>로 나온 게 1996년이다. 한글본 표지에는 “피곤을 모르고 임금도 필요 없는 기계들이 인간의 노동을 빼앗고 있다”는 선전 문구를 담았다.
제조와 서비스에서 기계가 인간 노동을 대체하는 새로운 시대는 “대량 실업, 세계적인 빈곤, 사회적 불안과 격변이라는 우울한 미래”를 가져올 수도 있지만, 반대로 “노동시간 단축과 복지 증진을 의미”할 수도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근대 역사상 처음으로 공식 시장의 장시간 노동에서 해방되어 자유로이 레저(leisure)를 추구할 수”도 있는 것이다.
문제는 새로운 시대의 “생산성 향상분이 어떻게 분배되는가”다. 공정 분배는 글로벌 수준의 노동시간 단축, 시장에서 축출된 사람들에게 사회적 경제(social economy)의 일자리 제공이라는 수단을 가진다. 불공정한 분배 상태가 유지되거나 악화되면, “생산성 향상분이 기업, 주주, 최고집행자, 하이테크 지식 노동자들”의 수중에 집중되고,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간의 격차가 세계적인 사회 정치적 격변을 야기”하게 될 것이라는 게 리프킨의 생각이다.
사실 노동시간 단축과 생산성 향상분의 공유는 새로운 아이디어가 아니다. 1932년 미국노동총연맹(AFL)은 “주30시간 노동제 실행”을 제안했고, 몇몇 기업들이 이를 받아들였다. 그 중 대표적인 사례가 켈로그였다. 소유주인 W. K. Kellogg는 “3교대 8시간제” 대신 “4교대 6시간제”를 도입했다. 시행 5년 후 나온 회사 보고서는 다음 내용을 담았다. “단위 원가(간접비) 25%, 인건비 10% 줄었고, 사고율은 41% 감소했다.” “종업원의 능률과 사기는 크게 올랐고, 사고율과 보험율 역시 개선되었으며, 단위생산비도 낮아져서 8시간 근무 때와 같은 임금을 6시간 근무 하에서도 줄 여유가 생겼다.”
<노동의 종말>이 기계화-자동화에 대한 미국노총(AFL-CIO)의 전술적 오류를 지적하는 대목은 흥미롭다. 단체교섭에서 생산 과정과 작업 과정에 대한 통제를 포기하고 재교육 요구로 물러선 것이다. “재교육에 대한 기회를 확보한다는 명목으로 기술과 기계에 대한 통제 문제를 포기함으로써 효과적인 교섭력의 많은 부분을 상실”했다. 기술 통제 문제가 단체교섭의 주요 의제로 남아 있었다면, 노동조합은 자동화가 가져올 생산성 증대에 노동자 참가를 보장하는” 기회를 확보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기술의 승리가 지배 엘리트에겐 축복이요, 노동자들에겐 저주가 되는 시대에 리프킨은 “노동시간 단축과 일자리 공유를 통한 생산성 향상분의 공정 분배”와 더불어 “비시장적 사회적 경제인 제3부문 일자리 증가”를 대안으로 내세운다. “사회 서비스, 건강, 교육, 연구, 예술, 종교, 변호 등” 공동체 서비스, “자원 재생 활동, 에너지 절약 활동, 반공해 운동, 동물 보호 등” 사회 활동, “연극반, 합창단, 소방, 치안, 재난 구조 등” 공동체 활동, “고령자, 장애자, 정신병자, 불우아동, 무주택자, 빈민 지원 등” 봉사 활동이 제3부문에 속한다.
직장에서 소비하는 시간이 줄어드는 것이 “실업”을 확산시킬 지, 아니면 “자유”를 확산시킬 지는 “정치적 영역에서 결정될 것”이다. 실업은 “격변, 갈등, 전쟁”을 초래할 것이다. 자유는 “공동체 연대 의식의 갱신과 민주주의적 유산의 부흥”을 가져올 것이다.
다 좋은 소린데, 돈이 없다고? “불필요한 국방비를 축소”하고, “대기업에 대한 불필요한 보조금을 철폐”하고, “불필요한 관료들을 축소”하는 데서 시작하자는 게 제레미 리프킨(사진)의 제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