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날드 니콜스(1923~1992)는 한국전쟁에서 맹활약한 미국 공군의 간첩이다. 집안이 가난했던 니콜스의 학력은 초등학교를 마친 게 다다. 미국 육군에 들어간 니콜스는 2차 대전 중 버마와 인도에서 근무했다. 전쟁이 끝나고 괌에서 대기하던 그는 1946년 동경에서 12주 간첩훈련을 받고서 방첩대(CIC) 제607단 한국분견대 요원으로 남한에 도착한다.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미군은 철수를 개시하여, 1949년 5월 군사고문단 5백 명만 남았다. 미군은 철수했지만, 1947년 공군 소속으로 전출된 스물다섯의 니콜스는 본격적으로 첩보 활동을 시작했다. 그의 첩보 작전은 테러·고문·학살과 결합되어 잔인한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한국전쟁은 그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었다. 그는 북한의 남침을 정확하게 예측했다. 무초 주한 미국대사가 남한 군부와의 연락 임무를 맡겼고, 곧이어 미국 공군 특별조사국으로 배치되었다. 1951년 미국 공군의 비호 하에 그는 자신의 비밀 왕국, 6004항공정보대를 창설하였다. 특공대·학자·언어전문가·파괴전문가 등으로 구성된 그의 부대는 낙하산 부대를 만들어 적 후방에 요원을 침투시켜 각종 정보를 수집하고 시설 파괴 공작을 수행하였다. 물론 작전의 성공률은 공작원의 사망률과 비례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0센티미터의 거구 니콜스를 ‘아들’이라 불렀다. 신실한 기독교인이자 권력욕의 화신이었던 이승만에게 니콜스 부대가 저지르는 잔악 행위들은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미군 장성들과 남한의 권력자들을 등에 업은 젊은 니콜스는 안하무인이 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니콜스가 담배를 피우지 않았고 술도 거의 마시지 않았다는 점이다. 여자에겐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만, 잘 생긴 한국인 신병이 오면 숙소로 데려가 같이 밤을 보냈다.
광기의 전쟁이 끝나자 미국과 남한 권력자들에게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던 ‘미치광이’는 부담스런 존재가 되었다. 1957년 미군 당국은 니콜스를 해임하여 미국으로 돌려보냈다. 그를 기다리던 건 전기충격기가 설치된 정신과 병동이었다. 미국 정부가 원했던 것은 니콜스의 건강이 아니었다. 당국자들은 미국 정부가 직·간접으로 관여되어 있던 전쟁범죄 정보로 가득한 니콜스의 기억을 삭제하고 싶었다. 그리고 1960년대 내내 FBI는 니콜스를 일급 범죄자로 추적했다.
니콜스는 자서전에서 자신의 작전으로 살해당하고 고통 받은 “(공산주의자로 간주되었던) 수많은 남자, 여자, 아이들에게 사과와 속죄의 마음”을 전했다. 하지만, 한국전쟁 동안 저질러진 수많은 전쟁범죄 행위에 대해 미국 정부는 아직도 침묵하고 있다. 사진은 국군의 정치범 학살 장면으로 미군 정보대가 촬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