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년 전인 1848년 2월 말 노동운동의 고전인 <공산당선언>이 23쪽짜리 독일어판 소책자로 영국 런던에서 출판됐다. 2월 24일 프랑스 파리를 필두로 노동자 민중 혁명의 천둥이 유럽 대륙에 우렁차게 울려 퍼질 무렵이었다. 저자는 막 서른 살이 된 칼 마르크스와 스물여덟 살의 프리드리히 엥겔스였다. 두 젊은이는 1847년 말 원고를 정리하고 다음해 1월 런던의 출판사로 보냈다. 1848년 프랑스어판, 1850년 영어판과 덴마크어판, 폴란드어판, 1863년 러시아어판, 1886년 스페인어판이 나오면서 유럽 전역에 보급됐다. 그 시기는 유럽에서 노동자들의 조직, 즉 정당과 노동조합이 출현하던 때와 겹친다. <선언>은 노동운동이 역사의 전면에 출현하는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선포한 셈이었다.
평생 ‘쿨’한 비판적 사고의 소유자였던 마르크스나 엥겔스는 <선언>을 금과옥조처럼 절대시하지 않았다. 1872년에 “(공산당선언이) 여러 군데에서 오늘날 낡은 것이 되어 버렸다”고 썼다. 특히, 두 달 동안 노동자들이 정치권력을 장악했던 1871년 파리 코뮌의 경험을 돌아보면서 “노동자 계급이 기존의 국가 기구를 단순히 장악하여 그것을 자기 자신의 목적을 위해 운영할 수 없다”는 평가를 내렸다. 1888년에는 <선언>에서 천명한 전술 중 일부는 “이미 낡아버렸음이 분명한데, 그 까닭은 정치 정세가 완전히 달라졌고, 역사 발전으로 당시 정당들의 대부분이 세상에서 소멸됐기 때문이다”고 썼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공산당선언>은 공산주의에 관한 글이라고 오해한다. 하지만,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미래의 공산주의에 관해 거의 말하지 않았다. 대신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 전개되던 1848년 당시의 정세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췄다. 대지주의 토지 몰수와 지주가 받던 지대를 국가 경비로 전용하자고 했다. 또한 고율의 누진세, 상속권의 폐지, 국립은행의 설립, 중요 산업과 국가 기반시설의 국가 운영, 공공성에 입각한 토지의 사용, 농업 노동력의 육성, 농업과 공업의 균형적 발전, 모든 사람에게 노동할 권리와 의무 부여, 무상 공공 교육 실시, 아동 노동의 철폐 등을 주장했다. 이 모두는 20세기 들어 대부분의 나라에서 기본적인 국가 정책으로 채택되었다.
<선언>에서 유명한 구절은 “지금까지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다”, “현대의 국가 권력은 부르주아 계급 전체의 공동 업무를 처리하는 하나의 위원회일 뿐이다”, “노동자들은 조국이 없다”, “한 시대의 지배적 사상은 늘 지배 계급의 사상이었을 뿐이다”,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일 것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만의 독창적 인식이었다기보다 당시의 시대 분위기와 학문적 성과를 반영한 표현이었다. 두 젊은이가 이해한 자본주의는 “(자본가가) 타인의 노동을 자신에게 예속시키는 힘을” 독점한 체제였다. 그 결과, “노동하는 사람들은 벌지 못하고, 버는 사람들은 노동하지 않는” 사회가 도래했다. “한 개인에 의한 다른 개인의 착취를 폐기시킬” 때 인간 해방은 이뤄질 것이었다.
▲ 공산당선언 출간 백주년 기념우표
1948년 <공산당선언> 출간 백주년을 맞아 소련 정부는 기념우표를 발행했다(사진). “기존의 국가 기구를 단순히 장악하는 데 그친” 소련은 노동자 해방의 목적을 위해 국가를 운영하는 데 실패했고, <선언> 출간 140주년을 맞이하던 무렵 해체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결국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분석이 맞았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