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재판소가 시대 흐름을 따라 민심을 받든다면 박근혜 탄핵 결정은 당연지사가 될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 최초의 대통령 탄핵은 구십여 년 전인 1925년 3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한민국 7년(1925년) 3월 11일 중국 상하이에서 대통령 이승만 심판위원회가 열렸다. 5인으로 구성된 심판위원회의 위원장은 상하이에서 밀정 제거와 일제 기관에 대한 테러를 주도했던 나창헌(1896~1936)이었다.
▲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선포식에 참석한 맥아더 옆에 앉은 이승만
탄핵 사유는 이승만(1875~1965)이 “외교를 빙자하여 직무지인 상하이를 떠나 5년 동안” 해외에 체류하면서 “난국수습과 대업진행에 하등 성의를 다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허무한 사실을 조작해 퍼뜨려 정부의 위신을 손상시키고 민심을 분산시켰으며”, “정부의 행정을 저해하고 국고수입을 방해하고 의정원(임시정부 의회)의 신성을 모독하고 공결을 부인하고”, “정부의 행정과 재부를 방해하고, 임시헌법에 의해 의정원의 선거에 의해 취임한 임시대통령으로서 자기의 지위에 불리한 결의라고 해서 의정원의 결의를 부인”함으로써 “대한민국의 임시헌법을 근본적으로 부인하는 행위”를 저질러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 심판위원회는 이승만처럼 “국정을 방해하고 국헌을 부인하는 자를 하루라도 국가원수의 직에 두는 것은 대업진행을 기하기 어렵고, 국법의 신성을 보지(保持)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순국 제현이 명복할 수 없는 바이고, 또 살아있는 충용들이 소망하는 바 아니므로” 임시대통령 면직을 “심판한다”고 결정하였다.
왕족 출신이라는 허영심으로 가득 찼던 이승만은 일제로부터의 독립은 우리 민족의 노력과 투쟁으로는 불가능하다고 믿었다. 이 때문에 1919년 9월 상하이 임시정부의 대통령으로 선출된 후에도 이승만은 일본 천황 히로히토와 조선총독부 앞으로 조선의 독립을 청원하는 편지를 보냈으며, 1921년에는 국제연맹에 위임통치를 청원하기도 했다. 자력에 바탕한 투쟁이 아니라 강대국의 자비와 은혜에 구걸함으로써 독립을 이룰 수 있다고 믿은 그는 1945년 10월 귀국해 미국과 친일파를 등에 업고 초대 대통령에 올랐다.
이승만 탄핵으로부터 한 세기가 지나 2016년 12월 국민들로부터 탄핵당한 박근혜의 뿌리는 친일파다. 친일파는 미군이 한반도에 진주하자 잽싸게 친미파로 변신했다. 친미파 이승만은 친일파를 등에 업고 권력을 잡았다. 이들은 극우적 국가주의, 즉 파시즘의 신봉자였다. 독재자로 국민을 짓밟던 이승만은 1960년 4.19 혁명이 일어나자 미국으로 달아났다.
이승만과 뿌리가 같은 박근혜는 외교를 빙자하여 해외여행을 다녔다. 국정과 업무에 성의를 다하지 않았다. 선거를 조작하고 블랙리스트를 만들고 거짓을 진실로 만들어 퍼뜨렸다. 행정은 공익이 아닌 사익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했고, 국가 재정은 낭비되었다. 입법부를 무시하고 모독하고, 사법부를 통제했다. 민주주의의 기초인 ‘법의 지배’가 무너졌다. 이승만과 달리 박근혜의 말로(末路)는 미국행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감옥이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