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너 닫기
뉴스등록
포토뉴스
RSS
자사일정
주요행사
맨위로

무당이 지배한 나라

등록일 2016년11월01일 15시15분 트위터로 보내기 네이버 밴드 공유

탄핵과 하야의 궁지로 몰린 박근혜가 군부와 경찰, 정보기관이 불법 관여한 선거를 거쳐 대통령 자리에 앉은 2013년 2월부터 오늘까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 아니라 무당이 지배한 공주의 나라였음이 분명해지고 있다. 본명이 ‘최필녀’이고 세간에는 ‘최순실’로 알려졌으며 2014년 ‘최서원’으로 개명한 무당은 1979년 초 ‘새마음봉사단’를 통해 박근혜와 관계를 맺었다. 박근혜의 남동생 박지만에 따르면, 최순실은 박근혜에게 ‘최면(催眠)’을 걸었다.

 

최순실에게 사로잡힌 박근혜는 최순실을 따랐다. 입는 옷에서 헤어스타일과 신발, 하찮은 가방에 이르는 일상 소품은 물론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대통령으로서의 연설과 대북 정책 등 국가 기밀 정책까지 무당의 입김과 손길을 거쳤다. 박근혜를 위한 내시-환관인줄 알았던 ‘문고리 3인방’이 최순실의 따까리였다는 증거가 속속 드러나고 있다. 그 결과, “최순실이 대통령이고 박근혜는 부통령”, “낮의 대통령은 박근혜 밤의 대통령은 최순실”이라는 말이 회자되고 있다.

 


▲1977년 3월 16일 새마음 궐기대회에 참석한 박근혜가 최태민 당시 구국봉사단 총재(오른쪽)의 안내를 받는 모습.

 

최면 걸린 박근혜를 믿고서 국민과 노동자를 우습게 알고 호가호위(狐假虎威)하던 이기권 고용노동부장관 류의 관료들은 결국 선무당의 굿판에 놀아난 푼수들이 됐다. 하기야 이자들의 민주주의와 노동권에 대한 지능은 딱 최순실 정도이니, 이들은 박근혜 정권 하 고위 관료 경력이 자기네 가문의 족보에 새겨지는 게 치욕이 아니라 영광이라 여길 것이다.

 

최순실 아버지 최태민(1912~1994)의 정체는 더욱 해괴하다. 북한 황해도 봉산에서 태어난 그의 이름은 7개나 되었다. 일제 때 순사였고, 한국전쟁 전후로 군인이었다. 1945년 광복 이후 이름을 ‘최상훈’으로 바꿨다.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군인을 그만두고 ‘최봉수’로 개명하고 사업가로 행세했다. 가정불화로 절에 들어가 승려행세를 하며 이름도 ‘최퇴운’, ‘공해남’, ‘방민’으로 바꿨다. 가장 널리 알려진 이름인 ‘최태민’도 그때 썼다.

 

1970년대 들어 ‘영혼합일법’을 설파하며 스스로를 ‘단군’과 ‘미륵’으로 칭했다. 육영수를 비명에 보내고 ‘멘붕’ 상태가 된 박근혜에겐 1975년 초부터 접근했다. 최태민은 “육영수의 영혼에 빙의되었다며 육영수의 표정과 음성을 그대로 재연”하는 기교를 부렸다고 한다. 최태민은 1975년 4월 대한구국선교단을 발족하고 총재에 취임했고, 그해 5월 임진강에서 열린 구국기도회에 참석한 2천명에 박근혜가 끼어 있었다. 온갖 추문에 휩싸인 최태민의 대한구국선교단은 박정희가 살해되고 전두환이 집권한 1980년 11월 강제 해산되었다.

 

하지만, 최태민과 그가 다섯째 부인에서 얻은 딸 최순실이 함께 맺은 박근혜와의 관계는 더욱 끈끈해졌다. 마침내 2013년 2월 전후로 대한민국의 권력 순위는 ‘최순실 1위, 그녀의 남편 정윤회 2위, 박근혜 3위’라는 사실이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실 행정관으로 일했던 경찰 박관천에 의해 드러났다. 나라를 말아먹고 말겠다는 아버지 무당의 꿈이 그 딸을 통해 실현된 것이다.

윤효원 인더스트리올 컨설턴트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올려 0 내려 0
유료기사 결제하기 무통장 입금자명 입금예정일자
입금할 금액은 입니다. (입금하실 입금자명 + 입금예정일자를 입력하세요)

가장 많이 본 뉴스

종합 인터뷰 이슈 산별 칼럼

토크쇼

포토뉴스

인터뷰

기부뉴스

여러분들의 후원금으로
행복한 세상을 만듭니다.

해당섹션에 뉴스가 없습니다

현재접속자 (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