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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족의 종착지였던 일본 황실

등록일 2016년09월08일 14시55분 트위터로 보내기 네이버 밴드 공유

친일파를 독립투사로 세탁하려는 자들이 늘고 있다. 민족 해방을 염원한 수많은 투사들이 일제 감옥에서 죽어가던 30년대 말 개인의 입신양명과 영달을 위해 일본 황군이 되기로 결심했던 박정희에 대한 세탁이 대표적이다. 2차 대전이 끝날 때 일본군 장교였던 박정희가 독립운동을 했다는 거짓말이 돌아다니고 있다. 그의 딸이 대통령이 되어 제왕처럼 군림하는 현실과 무관치 않으리라.

 

영화 <덕혜옹주> 때문에 이조왕가의 인물들도 민족의 해방을 염원했다는 터무니없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1912년 태어난 덕혜옹주는 어머니인 궁녀 양씨에게 내려진 칭호를 따 ‘복녕당 아기씨’라 불렸다. 아버지 고종은 1919년 죽었다. 열세 살 때인 1925년 3월 일제의 치밀한 계획 속에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이 아프자 1926년 4월 서울로 들어왔다가 순종의 장례도 제대로 못 치르고 도쿄로 돌아갔다. 1929년 어머니 양씨가 죽자 서울로 왔지만 역시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도쿄로 가야 했다. 그때부터 정신분열증으로 알려진 조현병을 앓았고, 이듬해 일제의 결정으로 일본 황실의 귀족과 결혼했다.

 

덕혜옹주에겐 배다른 오빠가 여럿 있었다. 가장 유명한 인물이 영친왕이다. 고종의 일곱째 아들로 어머니는 궁녀 엄씨였다. 엄씨는 민비가 살아 있던 1885년 고종과 사랑을 나눴다 쫓겨났다 민비가 참살당한 다음 복귀해 고종의 총애를 받고 1897년 의친왕을 낳았다. 공식 칭호가 의민태자인 영친왕은 1907년 이토 히로부미(1841~1909)를 따라 도쿄로 갔다. 이후 조선왕조는 일본 황실에 통합되었고, 영친왕은 대한제국의 황태자에서 일본제국의 황족으로 신분이 변했다.

 

 

1926년 조선의 마지막 왕인 순종이 죽자 왕위를 계승하여 ‘창덕궁 이왕’이 되었고, 이후 일본 육군사관학교와 일본 육군대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제국 육군에 입대하였다. 일본 황족의 일원으로 일본 황족의 딸과 결혼해 행복한 나날을 보내던 영친왕은 1945년 8월 계급이 중장에 이르렀다. 1945년 8월 9일 소련군이 만주로 진격한 지 사흘 만에 열린 일본 황족들의 긴급회의에서 쇼와 천황으로부터 무조건 항복을 전해 듣기까지 영친왕은 식민지와 전쟁 상황에서도 세상물정 모르고 편히 살았다.

 

1907년 영친왕은 나이 열 살에 ‘대한제국 훈일등 태극대수장’과 ‘대한제국 대훈위 이화대수장’, 그리고 ‘일본제국 훈1등 욱일동화대수장’을 받았다. 3.1운동 직후인 1920년에는 ‘일본제국 대훈위 국화대수장’을 받았다. 1927년에는 일본 황족의 자격으로 유럽을 여행하면서 프랑스, 영국, 벨기에, 네덜란드, 덴마크, 노르웨이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일본 제국주의가 최고조에 이르렀던 1942년에는 ‘일본제국 공3급 금치훈장’을 받았다. 단순한 일본 황족을 넘어 일본 제국주의와 파시즘 체제의 핵심으로 활동한 것이다.

 

사진은 이토 히로부미와 영친왕이 같이 찍은 사진이다. 일본군복을 입은 열 살 안팎의 아이는 환갑이 넘은 제국의 거인을 보면서 제국이 영원하리라 믿었을 것이다. 박정희를 비롯한 수많은 친일파들과 마찬가지로.

윤효원 인더스트리올 컨설턴트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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