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로마 황제 정부의 권위에 저항하고 국가 권력에 반대한 정치범으로 사형당했다. 십자가는 종교적인 상징이 아니라 로마 제국의 일상적인 처형 수단이었다. 예수는 자신이 신의 아들이 아닌 사람의 아들이라 거듭 말했다. 인간 예수가 신으로 승격된 최종 계기는 325년 니케아에서 열린 기독교 주교들의 공회의였다. 지금은 이즈니크로 불리는 니케아는 터키의 이스탄불에서 동남쪽으로 1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자리한 작은 도시다.
박해를 멈추고 기독교인으로 회심한 콘스탄티누스 1세(생존 272~337년, 재임 306~337년)가 니케아 공의회를 소집할 즈음 제국 거주민 6천만 명 가운데 5% 정도가 기독교도였다. 기독교에 대한 로마 제국의 박해는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적이 없었다. 2백 년 동안 로마 제국의 지배층이 박해를 주도한 적은 드물었다. 기독교는 광대한 제국의 영토 안에서 명멸했던 여러 종교 중 하나에 불과했다. 지금은 정치와 종교가 분리된 게 당연해 보이지만, 고대 세계는 그렇지 않았다. 정치가 종교였고, 종교가 정치였다. 로마 제국도 그랬다. 기독교도였던 콘스탄티누스가 정치적 권력을 동원해 종교적 논쟁을 종식시키려 한 것은 자연스러운 통치 행위였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정교 분리는 민주주의의 싹이 트기 시작한 근대의 산물이다.
콘스탄티누스 1세 시대에 기독교는 크게 보아 알렉산더 파와 아리우스 파라는 두 흐름으로 나눠져 있었다. 알렉산더와 아리우스 모두, 지금은 이집트에 속한 알렉산드리아에서 활동했다. 두 파의 차이는 예수가 하느님(God) 자체인가 아니면 하느님의 피조물인가였다. 알렉산더 파는 예수가 하느님일뿐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라 주장했다. 구원자 예수는 항상 존재했으며, 마리아가 낳기 전에도 존재했다. 하지만 아리우스 파는 낳기 전에는 구원자로서의 예수가 존재한 적 없다고 주장했다. 영원무궁한 존재인 하느님 빼고는 모든 존재가 시작을 갖고 있어야 한다.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도 예외일 수 없다. 예수는 신이지만, 하느님보다는 열등한 신이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알렉산더의 편이었던 모양이다. 공의회 참석 주교 318명 중 20명은 알렉산더에 동의하지 않았다. 황제의 심기를 거슬러 그분이 존재하지 않은 시대가 있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파문한다는 내용의 니케아 신경(信經)을 마지막까지 거부한 이는 3명이었다. 아리우스와 그의 고향 리비아 출신 주교들이었다. 이런 곡절을 거치며 팔레스타인의 작은 마을 베들레헴의 마구간에서 태어난 예수는 영원불멸의 신이 되었다. 가난한 자를 위한 해방 사상의 설교자는 부자도 마음이 가난하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보수적 종교의 창시자로 전락했다.
예수의 탄생일은 알려진 게 없다. 12월 25일이 지금의 크리스마스처럼 종교 성일로 기념되기 시작한 때는 니케아 공회의 직후인 350년대로 추정된다.
예수의 탄생을 묘사한 12세기 중세 시대 그림은 염소 둘, 목동 둘, 별을 따라온 동방박사 셋, 십대 소녀였을 예수의 엄마 마리아, 자기 아이가 아닌 줄 알면서도 마리아를 따라온 목수 요셉이 말구유에서 잠든 아기 예수가 만난 최초의 이들임을 알려준다. 마리아의 옷은 훨씬 너덜하고 허름했을 것이다. 메리 크리스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