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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협동주의의 기수 전진한

등록일 2015년08월17일 14시15분 트위터로 보내기 네이버 밴드 공유

한국노총 전신인 대한노동총연맹 위원장을 역임한 전진한은 일본 제국주의 압박 속에 조선 왕조가 마지막 숨을 몰아쉬던 1901년 경상북도 문경의 극빈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일본 동경으로 유학을 떠난 그는 1928년 와세다대학 정경학부 경제학과를 졸업하였다. 귀국 후 일본에서부터 이끌던 협동조합운동사를 통한 항일운동 때문에 치안유지법에 걸려 신의주 감옥에 이년간 갇히기도 했다. 출옥 후 불온분자로 낙인찍혀 변변한 직업을 얻지 못했고, 1933년부터 해방될 때까지 금강산 신계사와 오대산 상원사에서 참선수행을 하였다. 해방 후 우익운동에 투신하여 1945년 대한독립촉성 전국청년총연맹 위원장, 1946년 대한노동총연맹 위원장을 거쳐 1948년 제헌국회의원이 되었다.

 


 


전진한은 당시엔 우익운동에 속했으나,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좌익적인 주장을 헌법 제정 과정에서 정력적으로 펼쳐나갔다. 노동자의 경영참가권과 이익균점권이 그것이다. 본질적으로 경영참가와 이익균점은 자본주의를 타도하려는 체제 변혁이 아닌 자본주의를 수정하려는 체제 개량과 연관된 제도들로 노자 대등 입장에서 노동도 생산에 있어서 한 개 주체적 입장에 서게하려는 시도였다. 헌법 제정에서 자유주의의 정화와 사회주의의 진수를 집성 통일하려 했던 전진한은 사회성을 무시하는 개인주의의 폐단을 개선하는 동시에 인간을 기계화하려는 공산주의의 과오를 극복하고 싶어 했다. 
 

헌법 제정 과정에서 문시환 의원이 노동자의 경영참가권과 이익균점권 모두를 헌법에 넣자고 제안했고, 대한노총 위원장이자 의원인 전진한이 동조 발언을 했다.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에 참여했다 해방 이후 전향하여 친일파 정당인 한민당 의원으로 당선된 김준연(1895~1971)은 노동자의 경영참가와 이익균점이 기업의 수익을 떨어뜨려 결과적으로 취업 기회를 줄이고 임금을 저하시킬 것이라고 우겼다. 논쟁 끝에 경영참가권은 사라지고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사기업에 있어서는 근로자는 법률의 정하는 바에 의하여 이익의 분배에 균점할 권리가 있다는 내용으로 노동자의 이익균점권이 헌법 제18조 제2항에 삽입되었다. 하지만 사기업의 이익을 노동자에게 분배하는 법률은 만들어지지 않았고, 박정희가 주도한 군사 쿠데타 이후 이익균점권 조항은 헌법에서 사라졌다.
 

이승만 정권 하에서 초대 사회부장관을 역임했던 전진한은 이후 이승만 정권에 반대했고, 1955년 노동당을 창당하고 4.19 이후 사회당을 조직하면서 자유협동주의 사상의 실현을 위해 애썼다. 5.16 쿠데타 이후 박정희 정권에 대항하여 1963년 민정당을 발기하였고 1965년 통합야당인 민중당 지도위원을 맡았다. 사진은 1963년 1월 3일 박정희 군사정부에 맞서기 위해 회동한 김병로(초대 대법원장), 이인(초대 법무부장관), 윤보선(제4대 대통령), 전진한 등 당시 재야인사 4인의 모습이다. 1901년 태어나 영욕의 20세기 한국을 관통했던 전진한은 1972년 죽었다.

윤효원 인더스트리올 컨설턴트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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