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앞을 지나다 조선총독부 청사가 아직 서 있다면 어떤 느낌일까 가끔 생각해본다. 경복궁을 절단 내버린 총독부 청사 탓에 광화문사거리, 즉 교보빌딩 앞에선 청와대 뒷산인 북악산을 제대로 바라볼 수 없었다. 잘 지은, 그러나 자연의 선들을 거스르는 총독부가 턱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 중앙박물관으로 쓰이던 1988년 무렵의 총독부 청사
1916년 시작된 공사는 1926년 완공되기까지 10년이 걸렸다. 공사에는 일본인과 중국인 기술자와 조선인 노동자가 대거 투입되었다. 십구 년을 조선총독부 간판을 달았던 건물은 1945년 9월 9일 남조선에 진주한 미군에 의해 미군정청 청사로 접수됐다. 그날 오후 청사의 제1회의실에서 오키나와 주둔 미군 군단장 존 하지 중장과 당시 총독이었던 아베 노부유키 사이에 항복 문서 서명식이 열렸다. 일제는 한국민이 아닌 미군에게 항복했던 것이다. 미군은 청사를 캐피탈 홀(Capital Hall)로 불렀고, 이를 중앙청으로 번역하여 사용했다. 1948년 5월 10일 중앙청에서 대한민국 제헌의회가 출범했다. 그해 7월 17일 첫 헌법이 공포됐으며,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선포식이 열렸다.
한국전쟁 때 내부가 불탔지만, 석조 콘크리트 건물이었던 탓에 큰 손상은 없었다.
일제는 총독부 청사가 완공되자 1927년 광화문을 해체해 경복궁 뒤편으로 이전시키고 원래 자리에 서양식 정문을 만들었다. 한국전쟁 때 포탄에 맞아 목조 문루가 완파된 광화문은 1968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중앙청 앞자리로 옮겨졌다. 하지만, 제자리로 돌아가지 못하고 동쪽으로 10여 미터 북쪽으로 15여 미터 밀려났다. 방향도 관악산을 정면으로 바라보다 남산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5도 정도틀어졌다.
광화문이 중앙청 앞으로 옮겨진 1968년 이후인 1970년 정부종합청사가 완공되어 정부 부처들이 옮겨갔다. 과천이 행정 도시로 개발되면서 1982년 중앙청은 정부청사로서의 기능을 마치게 된다. 일제 강점기에는 한반도 전체를, 1945년 9월 미군 진주 이후엔 그 남부를 통치하는 국가권력 중추로서의 기능을 마감한 것이다. 정부청사로서의 기능을 마친 중앙청은 박물관으로 연명해갔지만, 곧 철거 여론에 봉착했다.
해방된 조국에 식민통치기관의 청사를 그대로 둘 수 없다는 여론은 1945년부터 꾸준히 있어왔지만, 이를 실행한 것은 김영삼 정권이었다. 1995년 시작된 해체 작업은 1996년 마무리되었다. 1926년 완공되었으니, 사람 나이로 치자면 일흔 살에 생을 마감한 것이다. 철거 당시 보존 여론도 만만치 않았다. “치욕의 역사도 기억해야 할 역사다. 일제 총독부보다 대한민국 정부의 중앙청으로 더 오래 썼다. 철거는 하되 파괴하지 말고 다른 곳으로 이전하자.” 많은 주장이 나왔지만, 결국 해체되어 지금은 그 잔해 일부만 독립기념관에 남겨놓았다.
차들만 다닐 수 있던 광화문 앞엔 민주화 이후 광장이 들어서 사람들도 다니게 되었다. 더 이상 거대한 총독부 건물이 사람들을 내려다보지 않고, 사람들은 거대한 콘크리트 더미 대신 복원 중인 궁궐의 지붕 너머로 펼쳐진 북악산과 인왕산의 자연스런 곡선을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총독부 청사가 철거될 때는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콘크리트 더미가 아닌 산과 하늘을 마음껏 바라볼 수 있는 지금은 철거를 잘 했다로 입장이 바뀌었다. 탁 트인 하늘 밑에 아름드리 자리 잡은 북악산과 인왕산을 바라보면서 뒤틀린 우리 역사도 조금씩 바로잡아 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과 더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