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병우 전국공공산업노동조합연맹 정책실장
촛불 뒤에는 몇 가지 말이 따라 붙는다. 저마다의 평가에 따라 또는 정치적 필요성에 의해 거룩해지기도 불순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저런 이해관계를 떠나 억압받던 소시민과 노동자가 무능한 국가권력과 부패한 집정자를 끌어내린 사례는 역사적으로 ‘혁명’이라 일컬어졌다. 광장에 모인 민심은 세상을 뒤엎을 만한 변화를 열망했고, 실제 촛불의 힘은 그것을 가능케 했다. 촛불 이전과 이후 혁명의 주체들은 승리를 만끽했고 모두가 세상이 달라졌다고 믿었다. 시위도 집회도 아니었던 촛불혁명 그 이후, 우리사회는 어디로 가고 있을까. 이 위대한 혁명은 과연 어떻게 귀결될 것인가.
국민의 나라, 정의로운 대한민국은 어디로?
지난 2017년 7월 사실상 인수위 역할을 했던 국정기획자문위원회는 문재인 정부 국정운영 5개년 계획을 발표하면서 국가의 비전을 ‘국민의 나라 정의로운 대한민국’이라 칭했다. 사유화된 국가권력과 정부에 대한 분노, 불공정한 기회와 격차확대로 인한 불만 그리고 희망의 상실이 우리 사회의 현 주소라 진단했다.
소득주도성장이라는 국정기조와 더불어 지난 정부에 비해 상당히 전향적인 노동정책이 해법으로 뒤따랐다. 비정규직 감축과 차별시정제도 개편, 2020년 최저임금 1만 원 실현을 통한 임금격차 해소, 주 52시간 근로 법제화 및 제도개선 등이 대표적이다. 이렇듯 진일보한 공약과 정책의 최종 목표는 노동존중사회의 실현이었다. 대선 정국에서 발 빠르게 조직적인 지지를 이끌어내고 정책협약을 체결했던 한국노총과 노동계의 역할이 주요했음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사회적대화의 중요성도 강조됐다. 각종 정부정책을 추진하기에 앞서 이해당사자들의 의견을 충분히 청취함으로써 다소 시간과 노력이 소모되더라도 사회적 합의를 통해 갈등과 부작용을 최소화 하겠다는 의미였고, 대통령 역시 이 ‘사회적 합의’를 특히 강조하며 국정운영에 국민의 뜻을 반영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그리고 실제로 2017년 10월에는 신규원전건설을 중단하며 탈원전을 선언했던 정부가 공론화위원회의 신고리 5, 6호기 건설 재개 권고를 수용하는 실천적 사례도 있었다.
노동계와의 허니문에 이상 징후가 보인 것은 최저임금 공약의 후퇴부터다. 여당이 반노동자 정당과의 합의를 통해 최저임금 산입범위를 확대하면서 정부의 노동존중 기조와 진정성이 의심받기 시작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최저임금 1만원 공약의 사실상 철회를 인정했다.
노동이사제는 어떤가? 법 개정은 더디고 ‘근로자 이사회 참관제’라는 권한도 실효성도 없는 해괴한 제도로 탈바꿈하고 말았다. 최근에는 탄력근로제 기간 확대를 당정이 함께 일방적으로 추진하면서 노동계와의 관계가 하루가 다르게 불편해지고 있다. 지난 11월 19일 이뤄진 한국노총과 더불어민주당의 고위급 정책협의회에서 김주영 위원장이 이해찬 당대표에게 “노동존중 사회 실현이라는 국정과제가 방향을 잃고 있다”며 현장 노동자들의 우려를 전달하고, 초심을 회복하라고 주문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산고 끝에 발족한 경제사회노동위원회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대통령이 집권 후 수차례 강조한 제대로 된 사회적 대화기구의 출범은 민주노총의 참여 여부를 놓고 1년을 허송세월하다 시종일관 양보하고 인내한 한국노총만이 참여한 채 그 시작을 알렸다. 그러나 탄력근로제 같은 노동계의 핵심 현안에 대해서 경사노위의 협의 결과와 관계없이 여야협의로 밀어붙이겠다는 둥 국회의 어깃장 놓기와 당청간의 불협화음을 보며, 과거의 실패를 답보하는 것은 아닌지 노동계의 걱정이 커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관료들은 아무 것도 바뀌지 않았다
공공부문에 한정해 본다면, 경사노위 내 업종별 위원회인 공공기관위원회 출범 과정 역시 어느 하나 쉬운 것이 없었다. 공공부문 노조는 그간 협의수준에서 그쳐왔던 기재부와 공공기관 노조 간의 대화의 수준을 노정교섭으로 끌어 올리고, 과거 보수정권에서 극히 일방적이고 강압적이었던 기재부의 정책추진 방식을 변화시키고자 이해당사자 간의 대화와 협의를 담보할 수 있는 협의틀을 만들기를 원했다. 그러나 기재부는 처음에는 사회적대화의 필요성 자체를 부정하더니, 마지못해 준비회의에 참가해서 공공기관과 관계없는 경총과 대한상의 등 경제단체를 구성원으로 받아들이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결국 현재까지도 책임을 지고 실제 기능할 수 있는 위원회를 만들기 위한 인원 구성에 상당한 이견을 보이고 있는 실정이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공공기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도 녹록치 않아 보인다. 일부 공공기관은 아직도 정부의 눈치만 살피며 시간끌기를 하고 있다. 정규직화의 결과가 자회사의 형태이든 직접고용이든 갈등요소를 수면위로 띄우고 구성원간의 원만한 합의를 위한, 그리고 종국적으로는 제대로 된 정규직으로의 전환을 위한 노력이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고 있다.
이러한 민심과 정치의 극명한 온도차가 현장에 만연하다. 기재부, 노동부 할 것 없이 관료들은 아무 것도 바뀌지 않았다. 여당조차 새로운 국가에 대한 통치자의 열망이 의심받고, 그것이 지지율 하락으로 표출 되는 지금의 상황을 어설픈 우클릭 전략으로 만회하려 하고 있다. 진단이 완전히 틀렸기에 더욱 역효과를 불러올 것이다. 이 정부에게 촛불로 권력을 준 국민과 노동자들은 통치자에게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주권자로써 부여해준 권력이 끝내 멈춰서고 변질되는 것을 용납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물론 퇴보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언제나 사회개혁을 뭉개왔던 기득권과 일부언론의 침소봉대와 그로인해 왜곡된 여론도 주요 원인이겠지만 급진적인 정책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을 가진 적당주의자들의 표심을 잡기위한 정치적 선택의 여파도 무시할 수 없다. 촛불로 발현된 엄중한 국민의 명령과 개혁을 넘어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로의 대개조를 바랬던 염원은 어느새 ‘정치’의 틀거리 안으로 갇혀졌다. 대한민국의 정치는 개혁의 대상이건만 애석하게도 촛불마저 그 늪에 빠지고 말았다.
국가의 주인은 국민이라는 것을 일깨워 줬음에도 정치의 논리로 해결하려는 구태와 변화된 세상을 거부하는 관료들의 무책임과 무능력함 그리고 너무나도 일찍 꺼져버린 적폐청산의 잉걸불. 그것이 한보이건 반보(半步)이건 말이 아닌 실천을 요구하는 국민의 마음은 손마다 촛불을 나눠 들었던 그 때의 겨울과 다르지 않다.
뜨거운 노동운동이 해답이다
결국, 다시 노동조합이다. 뜨거운 노동운동이 해답이다.
뒷걸음질 치는 정권의 개혁의지를 다시 부여잡고 전진하게 만들 동력은 조직된 노동자의 힘이다. 변화를 거부하는 관료를 움직이게 만드는 것도, 국회가 제대로 된 민심을 수용하게 하는 것도, 그리고 정치라는 틀에 갇힌 촛불의 열망을 다시 국정운영의 나침반으로 되살리는 것도 결국 노동조합이 앞장서야 할 일이다.
돌이켜 보면, 새로운 세상이 왔다고 생각했던 것은 혁명의 주체들 즉 국민과 노동자들의 착각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더 나은 세상을 꿈꿔야 하며 국가의 제대로 된 역할을 끊임없이 주문하고 끌어나가야 한다. 날카롭게 견제하고 치열하게 투쟁하며 노동의 가치를 지켜내는 일, 그리고 노동존중 사회를 쟁취하는 과업은 촛불 시대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이자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노동조합의 존재 이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