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보헌 前노동자신문·노동일보 기자
최근 끝난 TV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주인공과 100년 전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로 불렸던 최재형 선생(1860~1920)을 비교하는 얘기를 가끔 들었다. 그 드라마를 전혀 보지 못했으니 비교론의 진위는 알 수 없다. 대신 얼마 전 다녀온 연해주 독립운동 답사의 기억이 떠올랐다.
약 한달 전 필자는 시민운동 및 종교계 원로들과 함께 블라디보스톡, 우수리스크, 하바롭스크 등 러시아 극동지역의 한인 독립운동 유적들을 살펴보고 왔다. 당연히 최재형 선생의 흔적과 여러 차례 조우했다.
최재형 선생은 함경도 노비집안 출신으로, 19세기 말의 여느 조선 민중들이 그랬던 것처럼 배고픔과 착취를 견디다 못한 가족들의 손에 이끌려 9살 때 두만강을 건넜다. 젊은 시절 사업을 통해 막대한 부를 모았고 러시아정부와 한인 지역사회에서 모두 신망이 높았다. 선생은 이렇게 평생을 모은 재산과 명성을 독립운동에 모두 쏟아 부었고 마지막에는 목숨까지 바쳤다.
한인 권익보호와 교육사업에 열중했던 선생은 을사늑약 이후에는 독립운동조직 설립과 신문발간, 의병활동에 전력을 투구했다. 안중근 의거 등을 전폭 지원했다. 임시정부 초대 재무총장에 임명됐으나 사양하고 무장투쟁을 준비하던 중 1920년 4월 일본헌병에 체포돼 사살된다.
연해주는 또한 한인 최초의 볼세비키이자 여성 독립운동가였던 김알렉산드라의 마지막 발자국이 굵게 새겨진 곳이다. 김알렉산드라는 치열한 항일투쟁으로 혁명정부의 하바롭스크 책임서기 및 극동 외무장관까지 올랐고 함께 한인사회당을 창당한 이동휘, 김립 등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18년 4월 하바롭스크 함락 당시 러시아 백군에 체포돼 처형된 뒤 시신은 아무르강에 던져졌다.
이들은 마지막 모습까지 한 치 흐트러짐이 없었다. 최재형은 자신이 체포될 걸 알면서도 끝까지 자택에 남아 일본군에 끌려갔다. 연해주지역 독립운동 후배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고 알려진다. 김알렉산드라는 “여자라서 남자들 말에 따라 혁명운동을 했다고 하면 살려주겠다”는 회유를 단호히 거부하고, 조선의 13도를 상징하는 13발자국을 떼고 태연히 총탄을 받았다. 이들이 죽음 앞에 당당했기에 그 정신은 살아남았고, 오늘의 우리가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두 사람 외에도 연해주는 이상설 선생 유허비, 이동휘 선생 거주터, 안중근 의사 단지동맹비 등 수많은 영웅들의 흔적이 남아있다. 특히 1937년 강제이주 당시 ‘일본인 첩자’라는 누명을 쓰고 체포돼 이듬해 처형된 작가 조명희 선생, 항일 무장투쟁의 영웅이며 17년 뒤 강제이주로 동포들과 함께 중앙아시아(카자흐스탄)로 끌려가고 나서도 조선극장의 수위로 끝까지 민중과 함께 했던 ‘연해주의 큰 어른’ 홍범도 장군과의 만남은 큰 울림을 안겨줬다.
연해주 지역은 러시아 영토라는 특성상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이나 좌우합작 시도(노령임시정부, 자유시 사태 등)가 활발했던 곳이다. 그만큼 대중에 알려진 것도 늦었다.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유공자 서훈도 부진한 편이다. 특히 이명박·박근혜정부 때는 거의 사례가 없다고 한다. 이 지역의 독립운동사를 재조명하고, 숨은 영웅들을 찾아내는 일도 시급한 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