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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걸 결정하는 처음

최수빈

등록일 2023년09월04일 17시00분 트위터로 보내기 네이버 밴드 공유


 

인턴으로 일하던 중에 하루아침에 직원 절반이 사라지는 걸 목격했다. 직원 실종 사건은 중요한 문서와 그렇지 않은 문서를 구분하는데 서툴렀던 신입 경리직원의 손끝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대외비에 해당하는 전 직원의 급여 대장을 파쇄기 대신에 이면지함에 넣고 말았다.

 

한 직원이 이면지함에서 급여 대장을 발견하면서 마침내 모든 직원이 옆자리 동료가 얼마를 받는지 알게 되었다. 대외비가 의도치 않게 공개된 다음부터 회사 분위기는 흉흉했다.

 

급여 대장이 공유문서가 된 후 모두의 시선이 삼성전자에서 5년간 근무하다가 갓 이직한 경력직 사원에게 향했다. 그 직원이 이 회사에서 10년간 근무한 사람보다 월급을 많이 받는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자신이 상대적으로 적은 월급을 받고 일했다는 사실에 상처받은 직원들은 회사를 떠났다. 이 일로 상처받지 않은 사람은 누구와 비교해도 가장 적은 월급을 받고 있던 인턴들이 유일했다.

 

그가 10년 차 직원보다 많은 월급을 받을 수 있었던 건 삼성전자 덕분이었다. 그는 이직할 당시 이전 직장에서 받았던 연봉을 기준으로 연봉 협상을 했다. 삼성전자의 초봉은 중소기업의 두 배에 달한다. 남들보다 두 배나 많은 연봉을 받으며 사회생활을 시작했던 그는 5년 차 직장인이 되었을 때 10년 차 중소기업 직원보다 더 많은 월급을 받게 되었다.

 

처음이 모든 걸 결정한 셈이다. 처음부터 남들보다 높은 연봉을 받았던 사람은 계속해서 더 많은 돈을 받으며 일하고, 처음 생긴 격차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의도치 않게 퇴사 유발자가 되었던 직원은 모두가 가고 싶어 하는 회사에서 근사하게 사회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모두의 처음이 그 직원처럼 성공적인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대학이 지방에 있어서, 긴장해서, 운이 나빠서, 경제 상황이 좋지 않아서, 대기업이 많지 않아서, 처음부터 높은 연봉과 복지를 제공하는 회사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하지 못한다. 작년 기준으로 전체 취업자 중에서 오직 10% 만이 대기업에 들어갔다. 90%의 취업자들이 바로 그 누군가인 셈이다.

 

조금은 어리고 오만했던 나는 인턴 생활을 할 때 내가 당연히 성공적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10%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90%의 사람들이 처음의 격차가 영원한 격차가 되는 현실 앞에서 겪는 무력감이나 박탈감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건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확률을 완벽히 무시한 판단이었다.

 

대기업 입사에 실패하고,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온 줄 알았는데 지금까지 뭘 한 건가 싶어 잠깐 허송세월을 하다가, 일 년 전쯤에 중소기업에도 못 미치는 작디작은 회사에 다니게 된 뒤에도 나는 한동안 긍정적이었다. 대기업에서 일하는 동년배가 받는 월급에 비하면 내 월급은 우주먼지만큼 미미했지만, 나는 내 얄팍한 지갑을 보며 절망하지 않았다. 잘하면 한 방에 또래와의 임금 격차를 한 방에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내가 무지해서 막막한 격차 앞에서도 긍정적일 수 있었다는 걸 최근에서야 알게 되었다.

 

얼마 전 막내 동생이 졸업하자마자 삼성에 입사했다. 동생의 첫 월급명세서를 보고 난 뒤에야 삼성 같은 대기업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돈을 얼마나 많이 받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있었다. 수습 기간이라 원래 금액의 80% 밖에 나오지 않았다던 동생의 첫 월급은 내 월급보다 1.5배가 많았다. 동생이 수습 기간을 마치고 상여금에, 각종 수당까지 받게 되면 내 월급의 두 배 가까운 돈을 받게 될 거다.

 

이제는 내가 대기업에 들어가지 못한 90%의 사람이 된 관계로 받아들여야 하는 격차가 만만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생각했던 것보다 거대한 격차에 막막할 따름이다.

 

나는 과연 막내 동생 같은 사람들과의 격차를 극복할 수 있을까? 평생 중소기업에서 일했던 아빠는 첫 월급을 받은 막내를 대견해 하면서도 한숨을 내쉬었다.

“막내는 내가 30년 차에 받은 연봉을 15년만 있으면 받겠네.”

 

아빠가 내쉰 한숨이 꼭 내 것 같다. 급여 대장이 공개된 후 회사를 떠났던 직원들의 심정도 이제야 좀 알 것 같다. 처음이 영원이 되는 사회에서는 한숨이 끊이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더 많은 기회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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