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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그리 정신

최수빈

등록일 2023년06월01일 10시09분 트위터로 보내기 네이버 밴드 공유

어버이날을 맞아 할머니를 모시고 큰고모네와 함께 놀러 갔다. 놀러 간 이틀 내내 비가 내렸다.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숙소에만 머물러야 했다.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는 동안, 큰고모는 내내 자신을 닮지 않은 딸들에 대한 걱정을 쏟아냈다. 자신에게는 ‘헝그리 정신’이 있었지만, 딸들에게는 그게 없는 것 같다고 했다. ‘헝그리 정신’이 없는 딸들이 늙어서까지 혼자서 잘 살 것 같지는 않고, 빨리 결혼을 해야 할 텐데 영 그럴 생각이 없어 보여서 또 걱정이라고 했다.

 

국립국어원은 ‘헝그리 정신’을 ‘끼니를 잇지 못할 만큼 어려운 상황에서도 꿋꿋한 의지로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정신’이라고 설명한다. 큰고모가 살아온 인생을 돌이켜 보면, 고모는 ‘헝그리 정신’을 말할 자격이 충분하다. 큰고모는 서울에 집이 세 채가 있다. 게다가 모두 역세권에 있고 소위 ‘국평’으로 불리는 30평이 웃도는 아파트이다. 집값이 끝없이 상승하는 동안 큰고모의 재산은 수십억 원으로 불어났다.

 

큰고모가 사촌들 사이에서 존경받는 이유는 단지 서울에 집이 세 채라서가 아니다. 그 모든 것을 친정이나 시댁의 어떤 도움도 받지 않고 오롯이 혼자서 해냈다는 것. 그것이 큰고모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든 친척에게 존경받는 이유이다.

 

큰고모는 일곱 식구가 농사일에 매달려도 세끼를 챙겨 먹기가 어려웠던 집안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인간의 덕목 중에서 가장 중요한 건 단연 ‘일을 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시는 분이었다. 큰고모는 그런 할아버지가 가장 마음에 들어 했던 자식이었다. 할아버지가 자식들에게 불쏘시개로 쓸 솔방울을 따오라고 시키면, 큰고모는 누구보다 빠르게 산에 올라서 포대가 찢어지기 직전까지 솔방울을 따오곤 했다.

 

할아버지는 큰고모가 솔방울로 가득 채워온 포대를 보고 함박웃음을 지었지만, 고등학교에 가고 싶다고 하자 더는 그렇게 웃지 않았다. 몇 날 며칠 동안 밥을 굶고 나서야 큰고모는 간신히 고등학교에 갈 수 있게 되었다. 큰고모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아무 연고도 없는 서울로 향했다. 서울에서 고모가 처음으로 하게 된 일은 슈퍼마켓의 ‘캐셔’였다. 큰고모는 번 돈을 악착같이 모았다. 먹을 거 덜 먹고, 입을 거 덜 입어가면서. 그러는 와중에 남동생의 대학 재수 뒷바라지도 했고, 갑자기 지낼 곳이 사라진 큰오빠네를 데리고 함께 살기도 했다.

 


▲ 이미지 출처 : 이미지투데이

 

서울살이에 보태준 것 하나 없던 친정은 고모가 큰 딸이고, 서울에 살고 있다는 이유로 가족을 책임지게 했다. 불공평한 처사에도 큰고모는 불평하지 않았다. 대신에 더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큰고모는 마침내 서울 홍제동에 아파트를 한 채를 분양받았다. 아파트 한 채에 만족하지 않았던 큰고모는 그 뒤로도 돈을 열심히 모았다. 돈을 모으면 티끌과 다름없던 돈이 아파트 세 채로 불어날 때까지 아파트 매매를 반복했다.

 

아빠에게 큰고모가 살아온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큰고모가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큰고모가 살아온 시대도 놀라웠다. 큰고모는 주식 ‘떡상’도, 로또 당첨도 없이, 오직 월급을 차곡히 모아서 첫 아파트를 샀다. 슈퍼마켓 ‘캐셔’로 일해서, 월급을 악착같이 모으면 서울에 있는 아파트를 살 수 있었던 시대. 고모가 살았던 게 그런 시대라서 ‘헝그리 정신’으로 살 수 있었던 건 아닐까?

 

‘헝그리 정신’이 없는 건 큰고모의 아이들뿐만이 아닐 것이다. 나는 큰고모의 입에서 ‘헝그리 정신’이라는 말이 나왔을 때, 인터넷 검색을 해본 뒤에야 그 단어의 뜻을 알게 됐다. 우리에게는 ‘헝그리 정신’이라는 말조차 낯설다. 다윈의 진화론적인 관점에서 볼 때, ‘헝그리 정신’이 잘 먹고 잘 사는데 지금도 도움이 된다면 우리가 ‘헝그리 정신’으로 살지 않을 이유가 없다. 세상도 변했다. 더는 월급을 성실하게 모아서 서울에 아파트를 사는 것이 가능하지도 않다.

 

고모가 진짜 걱정할 일은 ‘헝그리 정신’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사라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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