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옷장 앞에 서서 ‘오늘 뭐 입지?’ 하고 고민하는 시간을 사랑했다. 가장 듣고 싶은 칭찬도 오늘 입은 옷 어디서 샀냐는 것이었다. 교복을 입게 되면서 몇 년간은 아침의 기쁨을 포기하고 살았다. 대학에 입학하면서부터는 마음대로 옷을 입지 못했던 지난 세월을 보상하겠다는 듯이 옷을 미친 듯이 사기 시작했다. 버스 타고 갈 곳을 걸어가고, 1일 1식을 해가면서 옷을 사고 또 샀다.
순탄치 않았던 취업길에서 다시 부모님 집으로 돌아오게 되면서 나는 극단적으로 변했다. 예전의 나는 죽기 전에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옷을 입어봐야 직성이 풀릴 것처럼 옷을 사던 사람이었다. 변한 나는 옷장에 옷 한 벌이 늘어나면 집이 무너지기라도 할 것처럼 옷을 사지 않았다. 옷을 대하는 태도가 변했을 무렵, 세상에는 미니멀리즘과 환경 보호를 외치는 사람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나도 그런 사람 중 한 명으로 변한 줄 알았다.
정규직이 되고 나서야 진실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미니멀리스트도, 환경 보호에 앞장서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저 옷을 살 만한 충분한 돈이 없었을 뿐이었다.
실패와 방황을 거듭하다가 스물아홉이 되어서야 월급 생활자가 되었다. 처음으로 월급을 받았던 날, 아주 오랜만에 옷가게에 들렀다. 작정하고 찾아간 것은 아니었다. 그날 내가 들른 옷가게는 퇴근할 때마다 지나치게 되는 길목에 있었다. 그동안은 그 가게에 눈길을 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월급을 받아서 통장에 잔고가 여유 있게 되자 그 가게가 비로소 눈에 들어왔다. 그곳에 한 번 들러봐야겠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든 것도 그때였다.
옷가게에 발을 딛는 순간, 내 영혼은 ‘옷 금욕주의’에서 단박에 풀려났다. 지친 기색 없이 몇 시간 동안 옷가게를 휘젓고 다니는 내 모습은 몇 년간 옷을 거의 사지 않았던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다시 내 옷장에는 옷들이 하나둘씩 새롭게 걸리기 시작했다. 단벌 신사로 살았던 지난 몇 년은 순식간에 아득한 과거가 되었다. 요즘 나는 예전처럼 아침마다 옷장 앞에서 ‘오늘은 뭐 입지’를 고민한다. 예전과 마찬가지로 그 순간에 여전히 기쁨을 느낀다. 나는 변한 것이 전혀 없었다.
나는 안 하고 싶은 게 참 많은 사람이다. 운전 안 한다. 결혼 안 한다. 애 안 낳을 거다. 옷장을 통째로 비웠다가 가득 채우는 과정을 거치면서 내가 안 하겠다고 선언한 것들을 다시 보게 되었다. 안 하는 걸까, 못 하는 걸까? 그동안 ‘안 한다’는 말로 못 하는 현실을 감췄던 건 아닐까?
MZ세대의 근로소득은 금액적으로는 이전 세대보다 높아졌지만, 증가 폭은 오히려 감소했다. 인플레이션율까지 반영한다면 MZ세대의 근로소득은 이전 세대보다 훨씬 줄어들게 된다. 소득은 감소했지만 MZ세대의 부채는 이전 세대의 2~3배에 이른다. 소득은 줄고, 갚아야 할 빚은 많은 MZ세대는 쓸 수 있는 돈이 많지 않다. 실제로 MZ세대의 총소비량은 직전 세대가 같은 나이대에 소비한 양보다 적게 나타났다.
MZ세대의 소비성향을 분석한 결과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내용이 있다. MZ세대는 소유보다는 경험을 중시한다는 것이다. 공유경제가 활성화될 수 있었던 것도 소유에는 별 관심이 없는 MZ세대의 특징 때문이라고 한다. 이 결과는 소비할 여력이 없는 MZ세대의 상황을 감추는 말처럼 보인다.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은 인류 역사를 이끌어 온 원동력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하면 지금보다 많은 것을 가질 수 있을지 고민하던 인간은 생산성을 향상할 방법을 연구했고, 그 결과 기술이 계속해서 발전했다. 미디어나 전문가들은 MZ세대가 이전 세대와는 전혀 다른 종인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뇌과학자들의 생각은 다르다. 그들은 인간의 뇌는 수렵·채집인으로 살던 때에 멈춰 있다고 말한다.
MZ세대가 소유를 원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소유할 수 없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MZ세대가 ‘그냥’ 하지 않는 것도 없다. 할 수 있는 여력이 안 될 뿐이다. 하지 않는 것을 두고 청년들과 설전을 벌이기 전에 그들의 말라비틀어진 지갑을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