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8. 올해에도 최저치를 경신해버린 출산율을 발표하며 정부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2024년에 출산율이 0.7 명대까지 떨어진 뒤 2031년에는 다시 1명을 회복할 것으로 전망합니다.”
수많은 기자들 앞에서 말을 하려다 보니 정부 관계자가 긴장해서 아무 말이나 했나보다 싶었다. 사무실 들어가면 상사한테 왜 그런 말을 했냐고 혼 좀 나겠는데. 초면인 정부 관계자를 걱정까지 해줬다. 그런데 그 남자는 긴장해서 아무 말이나 한 게 아니었다! 통계청 홈페이지에서 출산율 통계를 찾아보니, 2031년 수치가 진짜 1이라고 표시되어 있었다.
이 자신감은 대체 뭐지? 정부는 2031년에 출산율이 1명대로 회복될 것이라는 발언이 근거 없는 자신감에서 비롯된 말이 아니라고 한다. 충분한 가능성도 있고 근거도 있는 이야기란다. 알고 보니 내가 자신감의 근원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정부는 91~95년생들이 열심히 아이를 낳아서 출산율을 1명대로 회복시켜줄 거라고 확신한다.
△자료=통계청
정부가 강력한 산아제한 정책을 실시하면서 출산율은 점점 하락하기 시작했다. 80년대 들어서 출산율은 60만 명 중반대에 안착하는 듯 보였다. 그러다가 1991년부터 1995년까지 신생아 수가 70만 명대에 재진입한다. 96년부터는 출생률이 빠른 속도로 감소하게 된다. 제2의 베이비부머 세대인 91~95년생들이 향후 5~10년간 본격적으로 출산을 하게 되므로 정부는 출산율이 자연 반등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나는 94년생이다. 정부에 따르면, 출산율이 전 세계에서 꼴찌인 나라를 구해낼 마지막 희망이기도 하다. 자고 일어났을 뿐인데, 내가 심각한 위험에 빠진 나라를 구할 히어로가 되어 있었다. 마블 영화를 보고 하루 정도는 슈퍼 히어로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막상 히어로가 되고 보니 기분이 썩 좋지 않다. ‘이 나라가 나를 이렇게나 믿고 있구나!’ 감동하기엔 믿음의 근거가 너무 부족하달까.
정부는 그동안 마지막 희망이라고 말하는 91~95년생들이 겪는 어려움을 오랫동안 외면해왔다. 이들의 고용 불안이 심각해질 때는, 기업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며 자유로운 해고와 비정규직 고용을 눈감아줬다. 이들이 주거 문제로 고통을 겪고 있을 때에는 7평짜리 청년 주택을 조금 만들어 주고는 생색만 무지하게 내지 않았나. 정치는 마지막 희망 세대의 사회적인 어려움을 해결하는 데 활용되지 않고, 더 많은 표를 얻기 위해 남녀 갈등을 조장하는 일에 쓰였다. 그래 놓고서 갑자기 이 나라의 미래가 너희들의 어깨에 달려 있다고? 하루아침에 신분이 슈퍼히어로로 급상승하고도 기뻐하거나 고마워할 수 없는 이유다.
90년대생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이는 정부에게 이 말을 꼭 전하고 싶다. 나를 믿지 마세요. 나만 믿고 가만히 있다가는 정말 큰일 납니다. 그러다 이 나라 정말 망해요. 엄마가 아이 셋의 엄마가 된 나이가 나도 되었지만, 나는 애가 한 명도 없다. 앞으로도 쭉 아이가 없는 채로 살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아이를 낳을 수 없어서가 이유의 절반이고, 나머지 절반은 낳고 싶지 않아서다.
나는 오랫동안 고용 불안 문제를 겪다가 작년부터 정규직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줄곧 돈을 까먹는 생활을 하다가 서른이 되고부터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간신히 내 몸 하나 건사하고 있는 상황인데, 다른 사람까지 책임지게 된다면 기본적인 생활도 불가능할 것이다. 이제 막 자리를 잡았는데 출산과 육아 때문에 겨우 얻은 자리까지 사라지고, 정말 갈 곳이 하나도 없게 될 까봐 낳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다.
다른 91~95년생들도 나와 비슷한 상황에 처한 것 같다. 올해 국무조정실이 시행한 실태조사에 따르면 2·30대 여성 중 55.3% 만이 출산 의사가 있다고 답했다. 같은 조사에서 2·30대 청년의 월 평균 소득은 180만 원 정도였다. 평균 생활비인 161만 원을 지출하고 나면 고작 19만원이 남는다. 아이를 낳고 기를 생각을 하기엔 턱없이 적은 액수다.
통계 수치를 보고 나니 정부에게 당부의 말을 몇 마디 더 전해야 할 것 같다. 나를 믿지 마세요. 우리를 믿지 마세요. 믿는다면 믿음의 증거를 보여주세요. 그걸 꼭 보여줘야 믿겠냐고요. 0.78, 딱 이만큼 각박한 세상이잖아요.